한국의 25시, 전영규 목사 ⑤ - 한국성결신문 한국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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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5시, 전영규 목사 ⑤
사명자의 길, 목회자로 헌신
[861호] 2012년 07월 18일 (수) 17:26:45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webmaster@kehcnews.co.kr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그는 목회자가 되기로 하나님께 서원했다. ‘그렇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던 전쟁터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었다. 덤으로 사는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쳐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자!’ 마음을 결정 하고 나니 기쁨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이 겪은 체험들이 목회에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는 1953년 4월 29일 포로들의 희망에 따라 광주수용소에서 부평 제10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가족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서울이 가까운 부평수용소를 택했다. 부평을 택한 포로들 대부분이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대한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그해 초여름이 되자 휴전회담이 재개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북측의 주장에 따라 강제송환이 결정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포로들은 울부짖었다. 포로들은 사지로 끌려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강제송환에 대해 죽음으로 맞선다는 혈서를 작성하여 대통령과 요로의 인사들에게 띄우고 시위에 들어갔다.

1953년 6월 18일, 부평수용소의 포로들은 대통령의 특명으로 반공애국포로가 석방된 사실을 알았다. 그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단으로 극비에 진행된 것으로 국군경비책임자와 포로들 간에 미리 연락을 취해, 새벽을 기해 탈출한 것이었다. 부평수용소는 국군경비대장이 그 자리에 없어서 명령을 받지 못해 탈출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유엔군 측의 경비병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강화했다. 삼엄한 감시 중에 밖으로부터 편지가 전달되었다. “댁들은 북으로 강제소환 될지도 모르오. 오늘밤 10시를 기해 탈출하면 자유대한의 군관민이 여러분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소.”

그날 저녁 10시가 되자, 예정대로 천오백 명 전원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많은 포로가 사살되고 300명만 성공했다. 전영규는 네 번째 철조망을 뛰어넘다가 하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오물통 속에 들어가 죽은 듯이 밤을 지새워야했다. 아침이 되어 끌려나왔을 때 수용소는 생지옥이었다. 6월 27일 전영규는 논산수용소로 이감되었다. 휴전이 성립된 후에 포로들 각자의 진로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이송되었다.

전영규는 판문점에서 한동안 익힌 영어를 바탕으로 통역관 노릇을 했다. 전쟁포로들은 최종적으로 남북한 대표들과 중립국에서 파견된 감시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자의 진로를 결정했다. 전영규는 북한의 집요한 감언이설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자유대한을 택했다. 12월 23일, 모든 절차가 종료되었다. 북한의 설득에 넘어간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영규는 1954년 1월 23일에 3년여에 걸친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자유대한을 택한 포로들과 함께 남행열차에 몸을 싣고 포항에 도착했다. 자유대한으로 귀속한 후 1954년 중앙신학교 야간을 다니다가 옥호열 선교사가 반공포로출신 신학생에게 수여하는 학비지원으로 1955년 서울신학대학에 전학했다. 아현동 빈민굴 교회의 집사로 봉직하며 신학수업을 하다가 졸업 후 김해군 장유면 개척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후 부산 수정제일교회에 목사로 전임하여 섬기다가 동기생 이원희 전도사와 함께 한강백사장의 이재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한강백사장에 이재민마을에 천막을 치고 ‘한강교회’ 간판을 걸었다. 약 800명가량 모여들자 이재민 교인들에게 WRC(동양선교회소속 세계구호위원회)에서 구호물자와 밀가루를 배급해줬다. 1963년 한강대홍수가 천막촌을 완전히 휩쓸어버렸다. 선명회(월드비전)의 후원으로 과천 남태령 고개 옆에 난민을 위해 6평짜리 주택 20채를 지어 거기에 등대교회를 세웠다. 그는 음성나환자 자녀 후원자결연사업에도 참여하고 홀트양자회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한미 반공강사로 다녔고 국내외에서 신앙 간증집회를 했다.

그는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목사가 되어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600여회의 간증·부흥집회를 인도하며 복음사역에 혼신을 다했다. 1998년 66세에 몹시 지친 몸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그의 시신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하여 남김없이 주고 갔다. 그의 자서전이자 간증집 ‘따미탕’이 있으며 2남 2녀 모두가 서울신학대학교 동문으로, 장남 전우철 목사(미국 뉴저지열방교회) 차남 전기철 목사(강남새사람교회)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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