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회의 순직모금과 오늘의 순직기념비

“오호통재라! 李목사의 별세함이여, 세월이 물과 같고 인생은 꿈과 같다더니 李형의 별세를 가르침인가? 이 영전(靈戰)에서 지사충성하여 최후일각까지 싸우다가 순직하였으니 십자가 군병의 떳떳한 일이요. 함께 군사가 된 동료의 자랑이로다! 아, 쓸쓸한 세상에서 그대의 행복된 죽음이여!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됨이로다.

… 나는 이제 목자를 잃은 군위교회의 어린양 무리와 남편을 잃은 부인과 아버지를 잃은 어린아이에게 무엇으로 위로하리. 눈물이 앞을 가려 목이 메여 말을 못하겠노라. 오, 주님. 당신의 종의 유족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李형이여, 나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면 반가이 만나리라.”(경주교회 이성영 목사)

위의 두 편의 애도사가 전국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어 전국 교회적으로 유족모금이 일어났는데, 당시 가난하고 어려운 일제 치하였지만 전국에서 41개 교회가 십시일반으로 참여하여 3개월 간 모금액이 총 432원 68전으로 활천에 보도되었다. 총회에서는 이 모금액 전액을 당시 영남지방회장(감리목사 강시영)에게 전달했다. 조위금을 수령한 당시 영남지방회의 감리목사와 대표자들이 고 이 목사 가족에게 찾아가 정중히 위로의 인사를 드린 후 구제금을 따뜻한 마음으로 전달했다.

당시 보통 집 한 채의 값이 100원 미만이었으니, 이 구제금으로 유족이 집 한 채를 마련한 후, 가족의 생계와 두 자녀의 양육비가 가능했으리라 본다. 이처럼 당시 우리 성결교회는 전국에 약 160여 교회에 불과했고 자립 교회도 30여 교회가 되지 않았지만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줄 아는’ 바람직한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총회의 배려를 통해 군위교회의 신자들은 큰 힘을 얻었고, 신앙으로 더욱 일치단결하여 시름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 영남지방에서 교회건축경험이 많은 삼천포교회의 유도역 목사를 공사감독으로 초청하여 교회건축 공사를 시작하여 8월 말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건축부채 관계로 헌당식을 못하다가 이듬해 6월, 오태상 목사가 부임하여 교회가 부흥되자, 그해 12월 12일에 눈물어린 헌당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지은 건물이 얼마나 튼튼한지 그 후, 교회가 일제의 해산령에 따라 타인에게 매매되었고, 해방이 되었어도 찾지 못하다가 6.25전쟁을 지나 1956년에 교회에서 당시 20만원으로 환수하여 교육관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이 건축된 지 70년 만인 지난 2007년 7월 3일에 국가문화재 제291호로 등재되어 그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군위교회가 문화재교회를 소유하게 되었다.

비록 이종익 목사가 성역에 종사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 그의 삶의 길이도 39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삶을 짧고 굵게, 그리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고, 몸과 마음을 주께 제물로 드렸다. 이는 모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따라서 그의 몸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자기보다 남을 그리고 교회를 더 사랑하는 고귀한 정신을 잇기 위해 지금 군위교회의 넓은 마당의 한 복판에 ‘고 이종익 목사’와 함께 순직한 ‘고 노성문 집사’의 순직비가 우뚝 서 있어 사람들에게 무언으로 외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군위성결교회는 농촌교회로서 큰 성장을 하고 있어 한국농촌교회의 성장모델이 되고 있다. 예부터 “순교자의 피는 헛되지 않으며,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 교부(敎父) 터툴리안의 말은 역시 진리였다.  <끝>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