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면허시험 합격과 성세의원 개원

의사가 되려면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의학전문학교는 입학시험도 어렵지만 몇 년 동안 학비가 만만치 않음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의사면허시험제도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독학으로 공부해서 면허를 따기도 했다. 그는 독학으로 의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다. 그는 어렵다는 의학 서적을 주문하고 독학으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의사가 되는 것을 꿈꾸며 난해한 의학용어를 익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과 술어를 알기 위해서 때론 전에 입원한 병원 의사를 찾아가서 묻고 배웠다.

이듬해 조국이 해방되었다. 광복이 되었으나 민족은 질서를 찾지 못하고 좌우파가 대립되어 아주 혼란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러나 그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의학 서적을 읽고 수술 과정을 노트에 그려가면서 열심히 익히고 공부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이었다. 그는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 위로를 받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의학공부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1950년 6.25 전쟁 중에도 계속됐다. 전쟁 중에 골방에 틀어박혀 계속 공부하는 모습은 참으로 무서운 집념이었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951년 10월에 시행한 의사면허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그 해 12월에 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가 시험에 합격하자, 비로소 얼마 전 중매로 서로 뜻이 맞은 박이영 양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때 나이가 28살이었고, 신부는 21살이었다. 결혼식은 신부의 교회인 경남 창녕읍 성내장로교회에서 거행했으며, 결혼 첫날 그는 신부에게 이런 글을 쪽지에 써서 전했다. “가야만 할 나의 운명, 와야만 할 당신의 운명,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어디는 못 오고, 어디는 못 가오리까? 자! 갑시다. 우리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그리하여 그는 평생의 꿈인 의사가 되자, 대전에서 개인병원 성세의원을 즉시 개원하고 뜻을 펴기 시작했다.

그의 성실한 치료로 병원에는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치료한 후 돈이 없어 사정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를 믿는다는 조건으로 무료로 해 주기도 했다. 특히 그는 결핵환자들에게 전력을 다해 치료했으므로 대전에서 ‘결핵병은 성세병원!’ 이렇게 소문이 날 정도였다. 어느 정도 병원이 자리를 잡자 그는 평소의 결심대로 결핵박멸 투쟁을 하기 위하여 몇 몇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 ‘결핵협회 대전지부’를 처음으로 결성하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실을 널리 선전하고 판매하여 결핵을 퇴치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는 광산노동자들이 결핵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x-ray 간접 촬영기를 가지고 청양군 광산촌 구봉광산에 들어가 경찰의 지원을 받아 결핵이 의심된 사람들의 사진 촬영을 했다. 그리고 결핵에 감염된 사람들을 분류하여 일일이 치료를 해서 많은 사람들을 낫게 했다.

또 그는 나병의 퇴치를 위해서도 대전에 나병환자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보건사회부에 진정서를 넣어 ‘음성 나환자와 양성 나환자를 구별하여 양성 환자는 별도로 수용하지만 음성 나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같이 생활해도 된다’는 의학 논리를 강하게 주장했다. 마침내 그의 주장은 보건사회부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이 사실을 널리 계몽하여 일반 사람들의 이해를 촉진하였다.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 전염이기 때문에 음성 나병환자(미감아) 자녀들은 일반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나병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보사부는 나병의 미감아들을 일반아이들과 같이 취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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