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당 건축 모금활동과 구 건물 헐다 당한 참변

1936년 당시 군위교회의 예배당은 건물이 좁고 많이 낡아 새롭게 신축을 해야 했다. 군위교회는 1927년 강태집 전도사 시절에 예배당 20평과 사택 10평으로 건축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 만에 신자는 전보다 많아졌으나 교회당은 심히 낡아 한쪽 모퉁이가 기울어지면서 신축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농촌인 군위교회 신자들의 헌금만으로는 건축이 어려워 이종익 목사는 전국교회의 모금과 함께 일본성결교회까지 찾아가 모금활동을 펼쳤다.

모금을 위해 몇 개월 동안 강단을 비울 수밖에 없어 이종익 목사는 그를 대신해 군위교회 출신 시각장애인 김영수 전도사에게 설교를 하도록 했다. 이 목사는 건축모금 활동을 하기 위해 수건(타올)을 만들어 국내외로 다니며 팔면서 모금을 하였고, 일본 동경에서는 자동차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는 등 고생을 했다. 치료 후에 즉시 귀국한 그는 당시 영남지역 순회목사 강시영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하였고 군위교회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아 헌금하여 일천여원이 모금되었다.

교회 건축은 남의 도움보다 신자들이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를 기금으로 하여 1937년 6월 1일을 기해 구 건물 철거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날이 되자, 이종익 목사를 비롯한 직원 4명이 건물의 철거작업을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그만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모두 밑으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당했다. 낡은 교회건물을 철거하러 올라간 이종익 목사와 정진근 장로, 노상문 집사와 김도리 집사 등 네 사람이 낡은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모두 낙상한 것이다.

성도들이 급히 낙상한 네 사람을 자동차에 실어 대구의 동산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했으나 워낙 중상을 당한 이종익 목사는 사흘만인 6월 3일에 소천했다. 그래서 이튿날 군위교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때 이 목사의 나이 39세였다. 유족은 27세 된 사모, 아직 철모르는 7살과 3살 된 두 아이가 있어 그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함께 낙상하여 부상을 입은 정진근 장로, 김도리 집사는 다행히 호전되어 한 달 만에 퇴원을 하였으나, 중상인 노상문 집사는 한 달 12일 만인 7월 12일에 이종익 목사를 따라 소천하고 말았다. 그래서 군위교회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건축공사가 중단되었고, 신앙이 연약한 신자들은 낙심하고 교회출석을 하지 않은 등 교회는 수난과 시련을 당해야만 했다.

군위교회의 이종익 목사의 순직 소식이 전해지자 총회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활천에 그의 사진과 함께 친지 교역자들의 애도의 글 두 편을 게재하며 그의 사역을 기렸다. 또한 지방회의 건의를 받아 총회 차원에서 유가족을 위한 구제금을 모금하였다. 활천에 실린 애도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 인생은 40부터라, 앞으로 할 일이 많은 때 왜 하나님께서 그를 속히 부르셨는지, 이 목사는 신체 건강하고 학식이 풍부하였으며 신앙이 견실하고 생활이 흠 잡을 데가 없었고 목회에 충성스러웠다. 그의 순직은 연령이나 교회나 유족으로나 탄식할 일이지만, 주님이 맡긴 사명 위해 분투노력하다가 먼저 낙원에 갔으니 주님의 위로를 받는 줄 안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귀부인과 아직 철모른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었으니 어떻게 하랴? 오직 하나님의 절대하신 축복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빌며 이만 붓을 놓는다.”(독립문교회 이준수 목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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