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에서 인민군으로

전영규는 천진에서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선봉소대로 배속 받아 행군의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창센으로 이동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두 번째로 포로가 되었다. 학습과 고문, 지겨운 포로 생활에 시달린 그는 탈출하고자 작심했다. 어느 날 중공군들이 대승을 자축하여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틈을 타 그는 탈출을 했다. 기쁨도 잠시, 숨어든 시골집 주인의 밀고로 다시 붙잡혔고 탈출에 실패한 그에게 더욱 잔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물이 절반가량 찬 흙구덩이에 들어가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있어야했다.

어떻게든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강렬한 집착으로 그는 중공군에 지원했다. 1949년 그는 병원 조수 경력으로 인해 의무병이 되었다. 그는 묘책을 세웠다. 하루 종일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미친 척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는 사실이 탄로나 영창에 갇혔다.

이후 갑작스럽게 부대가 이동했고 그도 열차에 올라타 전선으로 이동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린 열차는 신의주에 멈췄고 조장들이 들어와 군복을 바닥에 뿌리며 외쳤다. “동무들은 이 순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2군단 1사단 14연대 소속이다. 이제부터 동무들의 목숨과 투쟁정신은 인민의 앞날을 위해서 바쳐질 것이다.” 중공군과 인민군의 협약에 의해 중공군 내의 조선 사람은 인민군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그 대열에 전영규도 포함된 것이다.

고대하던 조국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인민군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인민군으로 둔갑한 그는 소련제 장총을 메고 발을 앞으로 쭉쭉 뻗으며 양손을 앞으로 쭉쭉 올리는 소련군대식 행군, 집총훈련, 총검술훈련 등을 받았고 기초훈련 후 의무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탈출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고국의 땅에 돌아왔으니 이제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1950년 1월 25일 부대가 이동하던 중 그는 대열을 이탈하여 탈출했다. 그는 이 때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한 민가에 다다르니 40대 후반의 점잖은 부인이 맞아주었다. 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괴로웠던 그는 냉수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자신의 사연을 털어놨다.

그 부인은 “나이도 어린 젊은이가 정말 많은 것을 경험했구려. 나는 기독교 교인이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어떠한 일도 두렵지 않다오.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기도뿐이니 젊은이도 예수를 한번 믿어보시오”라고 신앙을 전했다. 그는 그 부인과 두 세 시간가량 대화를 나눴고 급박한 상황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게 됐다. 그때의 감동은 이후 그의 가슴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체포되어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은 후 군사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목에 밧줄이 걸리는 순간, 이렇게 모질게 사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자고 마음먹으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나는 공산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탈출을 했소. 죽음을 각오한 일이니 후회도, 더 이상 할 말도 없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최후진술까지 거부했다. 담담하게 밧줄에 목을 내미는 찰나였다.

“야, 이 독종 살모사 같은 새끼야! 내래 만주 벌판에서 여기까지 20년 동안 날고뛰었어도 저런 독한 놈은 보다보다 처음이다. 이 보라, 밧줄을 벗기라오, 이런 놈은 끝까지 세뇌할 가치가 있어. 북반부 인민공화국정부는 동무와 같이 죽음도 불사하는 군인을 원한다.” 전영규의 굽힘이 없는 자세를 본 군관의 말이었다. 그는 이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게 되었다.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산다’는 기독교의 신앙진리를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얼마 후 부대는 남천(南川)근방 금교로 이동했다. 부대는 참호를 구축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장교훈련을 받았던 그는 인민군들이 큰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직감했다. 6월 22일 이동명령이 떨어져 꼬박 이틀을 걸어 6월 24일 밤이 되어 행군이 끝났다. 완전무장을 시킨 후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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