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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넘어온 여진헌 청년은 한동안 북녘에 두고 온 부모님이 생각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를 버리고 자기 혼자 살려고 38선을 넘어온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부모를 생각하면 현실의 모든 것을 접어두고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했다. 그는 성경을 날마다 읽고 또 읽으며 말씀의 깊은 뜻을 찾아 은혜를 받았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하면서 그는 이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 마침내 그는 목사님의 권고와 추천에 따라 1948년 9월, 서울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일화이야기
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09.1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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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붙은 긴 겨울날의 추위가 물러갔다. 온 누리에 따듯한 봄이 와 개나리 꽃, 진달래꽃이 온 산천을 한바탕 물을 들이고 지나 간 뒤에 목련 꽃이 피었다 지고, 장미꽃이 마당가에 붉게 피어났다. 여진헌은 이런 아름다운 계절인 1924년 5월 15일에 함양 여(呂)창언 씨와 모친 송삼덕 씨의 4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본적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 88번지이었지만, 그의 고향은 아버지의 본가인 황해도 수안군 정암면 보전리 355번지로, 산천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산골마을이었다.그는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도 싸운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화해정신이 뛰어났다. 그는 6살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8살에 이웃 마을에 있는 보통학교에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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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09.0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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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준 목사의 목회관은 교세를 크게 신장시키는 것이었다. 교회가 크고 성도가 많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청주교회의 부흥 성장에 전력투구하는 한편 청주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 지교회를 세우고 지원했다. 배 목사가 부임 이후 은퇴하기까지 20여년 청주교회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한 실력 있는 교회였다.그는 서문교회에 시무하면서 충청지방회장과 충북지방회장을 역임하는 가운데 여러 교회의 개척에 힘을 썼다. 서문교회에서 개척한 미죽교회(1938), 미평교회(1946.6.5), 양촌교회, 내덕교회(1955.8.1), 충주교회(1945년), 증평교회(1958년)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고 서문교회가 개척하지 않은 운동교회 등 충청지역 여러 교회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해줬다. 배 목사는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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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08.2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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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기념사업으로 성결교회는 성청장학관 건립과 교회교육 발간을 진행했다. 독립문 옆에 마련한 성청장학관은 농어촌 교역자와 평신도의 자녀들을 기숙 지도로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교회교육은 각 기관에서 발행하던 기관지를 통합하여 교회교육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또 희년사절을 미국에 파견하는 등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57년에는 100여개 교회가 증축되었고 119개교회와 4만여 신자가 증가하는 등 성결교회는 대대적인 발전기를 맞았다. 창립 이후 47년간 871명의 교역자를 배출한 서울신학대학도 크게 발전하여 당시 231명의 재학생이 수학 중에 있었고 신생부인회와 남전도회, 성청, 주일학교가 계속 발전하고 군목의 선교활동과 교육사업과 구호사업에 이르기까지 희년을 기해 줄기차게 발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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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8.2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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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태 전도사가 1960년 총회에 목사안수 청원을 했을 때의 일이다. 이 전도사가 목회경력이 없다며 반대하는 회원이 있었고 결국 담당부서에서 결정을 못하고 총회 통상회의에 내놓았다. 찬반격론 끝에 참석자들은 담임인 배문준 목사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이때 배 목사는 “이 전도사는 특수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찬양으로 나의 목회를 도와서 일했고, 일주일에 하루는 심방을 하였고, 일주일에 한 번 설교하였고, 열심히 목회에 협력했습니다. 그는 찬송을 잘 가르쳐서 성도들이 찬송의 능력을 받고, 충성된 교회일꾼이 되고, 복을 받은 교인을 만든 훌륭한 음악전도사입니다”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회원이 “그는 결과적으로 담임목사님께 협력하여 목회를 했으니 안수를 주기를 동의합니다”하니 동의가 가결되어서 안수를 받았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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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08.1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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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조치원교회가 폐쇄될 때 배문준 목사는 1943년 5월 26일에 검속되어 옥고를 겪다가 6월 18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 배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에 더욱 힘썼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음인지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 후 교회 모습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폐허상태였다.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 2개월 동안 사택에서 예배드리다가 가을 무렵 적산가옥인 일본인의 절간 한 채를 인수,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불상과 불교의 잔재를 깡그리 없애버리고 구석구석 주변을 정리하여 시작한 교회는 다시 옛날 부흥의 때로 돌아와 교인들이 차츰 늘어났고 두 번째 지교회로 전동교회를 세워 1947년 헌당식을 가졌다.배 목사가 조치원에서 시무하던 중 장남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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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8.0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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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준 목사는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최광리 322번지에서 부친 배중록(裵重祿)씨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1897년에 11월 27일(음력)에 태어났다. 대대로 미신을 유별나게 섬기던 집안인데다가 부친은 말술도 사양하지 않고 즐겨 마셨던 관계로 문준은 어렸을 때부터 술과 미신에 의한 폐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 그것들을 증오하면서 성장했다. 그가 전 생애를 거의 충청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충청도 태생으로 오인했다.노경에 배 목사의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아니 젊었을 때도 머리가 희었다고 한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얼굴은 홍안소년과 같이 붉고 건강한 화색으로 인해 종종 그보다 연령이 더 많은 분과 자리를 같이 했을 때에도 흰머리 때문에 좌장으로 인정을 받았다면서 웃음을 터트릴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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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07.2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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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 목사의 폭넓은 활동은 당시 한국 교계에 성결인들의 역할을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1950년대 한국 교계는 교단적인 연합체로 진보적 성향의 기독교연합회(NCC)와 뒤이어 창립된 보수적인 복음동지회(NAE) 등 두 단체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념적 갈등 없이 협의가 잘되었다.성결교회는 김창근 목사의 적극적 주도로 NAE와 NCC 두 단체에 모두 가입하여 활동했다. 우리 교단 인사 중 NAE회장으로 김창근 목사(1951), 황경찬 목사(1960)가 역임했으며, NCC회장은 김창근 목사(1953, 1954, 1960)가 3차례나 역임했다. 그리고 NAE 총무로 천순봉 목사가, NCC 총무로 김중환 목사가 일하는 등 당시 한국교계 연합 사업에서 성결교회의 영향력은 상당했다.그런데 1958년 미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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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7.1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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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적 심판 속에 일제는 연합국에 패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했다.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200여 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재흥총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총력을 경주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임원을 선출했는데, 김창근은 서기로 피택되었고 제2회 총회 때는 부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총회지도자로 급부상하여 전국의 성결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다했다. 그는 교단 해산시 경방단에 팔린 대전교회를 미군정을 통해 쉽게 회수했다. 그는 교섭력이 뛰어났다. 교회를 수리한 후, 흩어진 신자들을 불러 모아 교회를 재건했다. 재건예배를 드릴 때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 그 후 교세가 빠르게 회복되어 힘을 다해 1947년에 서대전교회(1947)와 대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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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7.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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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은 경성성서학원 2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다가 1931년 5월에 졸업했다. 그의 졸업 동기생은 한성과 교수, 차창선 목사, 그리고 전혜완 전도사 등 모두 16명이었다. 그는 졸업하기 전 아현교회 이기봉 장로의 장녀 이경숙 양과 결혼하였으며 졸업과 동시에 대전교회 부임전도사로 파송 받아 대전교회 주임목사요, 충호지방회 감리목사인 김응조 목사 밑에서 첫 목회를 배우게 되었다.그는 이듬해 감리목사인 김응조 목사에게 자청하여 교역자들이 가기 싫어하는 전남 신안군의 섬 교회를 자원했다. 이는 목회의 시작을 어렵고 힘든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나중에 목회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뜻을 가상히 여긴 김응조 목사는 1932년 3월 그의 첫 목회지를 전남 신안군 암태면 도창리 암태교회(현 암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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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7.0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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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은 이제까지 공부해서 입신출세하는 것밖에 몰랐다. 그러나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는 집회가 마치자마자 목사님을 찾아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했더니, 아주 기뻐하면서 즉시 이름과 주소를 적고 신자로 등록시켰다.그는 유교가 제일이라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부친과 가족에게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혼자 몰래 교회에 가서 신앙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는 매일 학교공부를 마치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고, 오후에는 형뻘 되는 청년에게 찬송가를 배웠다. 기억력이 좋은 그는 한번 들은 성경구절과 찬송가를 다 외워서 부를 수 있었다.그러나 그가 학교에서 항상 늦게 오는 것을 알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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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6.1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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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金昌根) 목사. 옛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그에 대해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NCC의 추종자로, 1960년 교단의 분열을 한 축에 선 사람이라는 부정적 견해다. 또 다른 하나는 사중복음의 주창자로, 복음을 사회로 넓게 확산하기 위해 교회행정, 교육, 복지사회 건설에 힘쓴 선구자였다는 긍정적 평가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편견 없이 그의 장·단점을 모두 소화하여 부정적인 면은 이해하고 극복하면서, 긍정적인 면은 적극 활용하므로 개인은 물론, 교회의 발전과 활성화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여기 그의 생애와 일화를 통해 그의 진면목을 살펴보자.조선말 5백년의 역사가 풍전등화와 같던 1907년 1월 27일 몹시 추웠던 그날, 그는 경북 합천군 대양면 오산리 마을의 유명한 한학자 김영함 씨의 다섯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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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6.1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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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기 장로는 공직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마저 다하지 못한 일을 하듯 더욱더 열심히 섬김과 봉사의 삶을 실천했다. 1978년 5월에 인수회장에, 이듬해 9월에는 부여군 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80년 11월에는 YMCA클럽 부여회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1981년 4월에는 부여박물관 회장에 취임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였으며 1981년 5월에는 교단 부총회장에 피선해 교단 부흥과 발전을 위해 헌신의 발걸음을 내디뎠다.국가의 공직을 명예롭게 은퇴한 그의 여생은 자신의 영성을 더욱 강화하는 삶을 위해 새벽 2~3시에 일어나 기도와 성경과 명상으로 하루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와 주의 종을 위하여, 믿지 않는 이웃들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또 시간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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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 (대신교회)
2013.05.2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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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부여군 농지개량조합장으로 자리를 옮긴 전준기 장로는 관직에서 부여지역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게 되어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1974년 5월 그는 서울신학대 재단이사로 피선되어 교단 신학의 요람인 서울신학대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이듬해인 1975년 5월 충남지방 장로회장에 피선되어 장로회 발전에 기여하였다.충남장로회장을 연임하고 있을 때의 일화가 있다. 장로회 정기모임에서 장로들의 질적 성장을 위해 서로가 연구 과제를 발표하고 함께 토론회를 종종 가졌는데 이때 어느 장로가 ‘교회에서의 장로 직분’을 말하면서 ‘장로의 직분은 목회자의 목회독주를 견제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장로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장로의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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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05.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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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내무과장으로서 지혜로운 직무수행을 통해서 부여중앙교회의 부흥에 일조를 한 전준기 장로는 1966년 6월 청양군수로 승진하였다. 1년 반 동안 오지라고 말할 수 있는 청양군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전 장로는 1967년 12월 고향인 부여군의 군수가 되어 금의환향 했다. 이후 고향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1969년 7월까지 부여군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은 후, 1969년 7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서천군수로 전임되어 서천의 발전에도 힘을 다했다.그는 1970년 3월에 고향인 부여군수로 다시 돌아와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인근 지역에 기독교의 복음에 호감을 갖도록 많은 본을 보였으며, 미신자인 군민들이 기독교의 복음에 관심과 함께 공감하도록 장로로서의 모범을 몸소 실천하는 군수로 활동하였다. 이런
일화이야기
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05.0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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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5일부터 라복리에는 6칸 집에 규암교회 기도처가 마련되었다. 목요일이면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주일 밤과 삼일 밤에는 규암교회가 멀어 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다. 1958년부터 라복교회 건축이 시작되었다. 1961년 교회 건축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성도의 숫자가 70명에서 100여 명까지 늘었다. 성도들의 모임이 커지고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게 된 라복교회는 교역자 파송을 요청하여 1961년 3월 서울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윤영기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그때부터 라복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던 성도들은 모든 예배를 라복교회에서 드렸다. 이때부터 라복교회는 규암교회에서 분리 독립하였다.당시 교단 분열의 와중에 전준기 장로와 윤 전도사를 비롯하여 전교인들은 1965년 제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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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04.2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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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에서 한국인들은 몹시 고달팠다. 특히 농촌의 실정이 더욱 암울하고 피폐했다. 1918년 8월 10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라복리 578번지에서 전준기(田俊淇)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담양이 본관인 전일용 씨였고 어머니는 황마리아였다. 4남 3녀 중에 둘째아들로, 무더운 여름철의 한복판에 그는 이 땅에 보내졌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일이 되면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집에서 10여리 되는 들길을 걸어 규암교회를 출석하였다. 어머니는 전통적인 유교가문인 전 씨 집안에서 맨 먼저 예수를 믿고, 그 복음의 씨앗을 가정에 심었다. 어머니는 교회의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후, 이름을 마리아로 개명할 정도로 믿음이 대단한 분이어서 준기는 그 영향을 받으며 믿음으로 성장했다.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
일화이야기
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04.1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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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장로는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자 우리나라를 위한 법관으로서 삶을 시작한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인재가 필요한 시기인 1945년부터 10년간 각처 법원장으로 근무했는데 청주지방법원 재직 당시 여당인 자유당의 비밀조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한 태극도교주사건(太極道敎主事件)을 담당하여 실형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대전지방법원장 재직 중에는 부정선거로 기소된 대전부시장의 재판을 맡아 진행할 때는 자유당 정권의 압력을 물리치고 실형을 언도, 이로 인한 정치 탄압으로 전주지방법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무엇보다 유명한 일화는 전주지방법원 재직 때에 당시 개표 부정을 한 이리시의 선거관리위원장을 폭행한 이철승(李哲承) 의원의 공무집행방해 사건을 맡아 재판할 때, 정치적 공세에 굴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4.1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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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선 장로는 자치교단으로 출발하는 성결교회 임시약법(聖潔敎會臨時約法)의 개정 작업을 수행했다. 동양선교회와 조선성결교단은 1929년 연회체제를 갖추고 성결교회의 완전한 자급과 자치를 추구하면서 한국인에게 성결교회의 리더십 이양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드디어 1932년 조선성결교회 제4회 연회에 이르러 역사적인 자치선언으로 이어져 1933년 ‘연회제도’를 ‘총회제도’로 승격시켰다. 이는 성결교회가 동양선교회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립해가는 중요한 회합이기도 했다. 제4회 연회의 이슈는 당연히 자치선언결의였다. 이사 이명직 목사가 그 동안 진행한 사실과 금후 자치해야할 사실을 간단히 설명하고 선언서를 낭독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깊으신 은혜를 찬송하여 마지않나니 우리조선에 순복음이 전파 된지 이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04.0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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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한 후부터 그의 신앙생활은 철저했다. 그는 구원의 확신과 신유를 체험하고 복음증거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전도 생활이 그의 삶의 전부라고 할만큼 열정적으로 헌신의 삶을 살았다. 문기선 장로의 결신과 헌신은 조선성결교단의 화제로 떠올랐다. 1932년 조선성결교회 제4회 연회(年會)석상에서 청진지방 감리사이며 청진교회 담임인 이정원 목사가 교세보고를 하면서 문기선 장로의 신앙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청진교회는 과거 1년 동안 부지런히 매월 둘째 주일과 넷째 주일을 특별전도주일로 지킨 결과 결심자 684인을 얻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수확은 문기선 변호사가 주께로 돌아온 일이라고 보고했다. 문기선 씨는 결심일로부터 주초를 끊고 자신의 과오에 대해 관계자에게 일일이 회개하여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3.03.27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