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고 신실한 백발 동안의 목회자

배문준 목사의 목회관은 교세를 크게 신장시키는 것이었다. 교회가 크고 성도가 많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청주교회의 부흥 성장에 전력투구하는 한편 청주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 지교회를 세우고 지원했다. 배 목사가 부임 이후 은퇴하기까지 20여년 청주교회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한 실력 있는 교회였다.

그는 서문교회에 시무하면서 충청지방회장과 충북지방회장을 역임하는 가운데 여러 교회의 개척에 힘을 썼다. 서문교회에서 개척한 미죽교회(1938), 미평교회(1946.6.5), 양촌교회, 내덕교회(1955.8.1), 충주교회(1945년), 증평교회(1958년)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고 서문교회가 개척하지 않은 운동교회 등 충청지역 여러 교회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해줬다. 배 목사는  6.25전쟁 기간에는 서구교회로부터 지원받은 구호물자의 충청지역 총책임자로서 물심양면으로 어려운 지역의 여러 교회에게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어 지교회의 자립과 부흥성장에 이바지함으로써 충청지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특히 교회에 대한 애착을 남다르게 쏟았으며 자신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고 타인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는 목회를 마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에는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남보다 먼저 새벽제단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는 은밀한 기도로 늘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하여 양 같이 어진 목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주로 본문설교나 강해설교였는데 조용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 속에 빠져들게 했다. 그는 설교준비에 성경을 깊이 상고하고 깊은 기도로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어질고 원만한 그의 성품대로 특히 병들었거나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찾아가 은혜로운 말씀으로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권면으로 새로운 힘을 얻게 했다. 부유한 신자를 특별히 더 찾아가는 일도 없었고 가난한 신자라고 소홀히 하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을 돌봤기에 일생 목회에 부작용 없이 교회를 꾸준히 성장시켰던 것이다.

그는 인자한 덕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노년에 그는 백발 동안으로 그의 인자한 품성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손자들에게 다정하게 뽀뽀를 해주고는 “에구 참 달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친손자, 손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남의 자녀들에게도 친자녀들처럼 많은 덕을 베풀었다. 청주교회에서 함께 목회하는 여전도사의 아들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켰고, 북한에 납북된 박형규 목사의 세 딸들을 사택에서 친딸처럼 숙식시키면서 훌륭하게 공부시켰다. 박 목사의 둘째 딸 종희는 권사로, 셋째 딸 종주는 대학교수의 부인, 넷째 딸 종우는 목사의 사모가 되었다. 이 일을 배 목사와 더불어 사모가 덕을 베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남의 자녀들에게 친자식처럼 사랑과 덕을 베풀어 유능한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많이 배출했다. 장문원 전문규 최병권 목사가 배 목사의 신앙지도로 감화를 받아 목회자가 되었으며, 김종호 장로를 비롯하여 김동수 김성수 손재연 전희준 이도영 장로 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장문원 목사는 배 목사의 자녀들에게 미안하리만큼 배 목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배 목사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곳을 순회 전도하다가 1967년 6월 4일 돈암동교회에서 설교하고 한의사였던 오태상 목사와 대화하다가 고혈압 증세를 일으켜 중부시립병원에서 한 주간 치료 중 6월 11일 6시 경에 주님의 나라로 부름 받았다. 아호를 작은 샘(小泉)이라 했던 그는 아현교회의 공원묘원에 그가 평소 존경했던 이명직, 문이호 두 목사의 가운데 자리에 편히 안식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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