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입신한 후부터 그의 신앙생활은 철저했다. 그는 구원의 확신과 신유를 체험하고 복음증거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전도 생활이 그의 삶의 전부라고 할만큼 열정적으로 헌신의 삶을 살았다. 문기선 장로의 결신과 헌신은 조선성결교단의 화제로 떠올랐다. 1932년 조선성결교회 제4회 연회(年會)석상에서 청진지방 감리사이며 청진교회 담임인 이정원 목사가 교세보고를 하면서 문기선 장로의 신앙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청진교회는 과거 1년 동안 부지런히 매월 둘째 주일과 넷째 주일을 특별전도주일로 지킨 결과 결심자 684인을 얻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수확은 문기선 변호사가 주께로 돌아온 일이라고 보고했다. 문기선 씨는 결심일로부터 주초를 끊고 자신의 과오에 대해 관계자에게 일일이 회개하여 큰 빛을 나타냈다.

변호사 사무소에 성서와 전도용 서적을 비치하고 변호사 사무소에 찾아오는 일반 내객에게 전도하였으며, 재판소 대합실에서도 큰소리로 하나님의 존재와 인생의 죄악과 미래의 심판을 외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족에게도 전도하여 여러 가정을 인도하였으며 그 외에 노방 전도에서나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을 주께 인도하였다. 성결교회의 자급정신이 투철하여 자기와 그 가족이 지급운동에 열심일 뿐 아니라, 일반교우에게까지 자급운동을 장려하여 교회가 전 자급(全自給)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또 결심일부터 가정예배를 매일 새벽에 드리는 중이라고 보고했다(1932년 성결교회 제4회 연회회록 4쪽).

그런 중 하나님께서 그에게 좋은 반려자를 허락하셨는데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 노양숙(盧良淑) 집사가 주일 학생들을 성심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목사님께 중매를 청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으로 그의 가정이 안정되면서 문기선은 변호사로서 더욱 열심히 일했고 교회 일에도 열심을 냈다.

하나님께서는 불치의 병으로 절망에 빠졌던 젊은이의 영혼을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고에서도 구원해주셨다. 결핵 4기의 환자가 변호사의 일과 가정생활을 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도를 하는 데도 오히려 더 건강해진 것이다. 그의 왼쪽 폐는 전부 굳어졌고 오른쪽 폐도 3분의 2가 굳어 폐의 기능이 불가능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신유의 기적으로 75세까지 건강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한 때 전주 기독병원 외국인전문의가 그의 병력을 진찰한 후 의학적으로는 생존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감탄한 일도 있다.

그의 삶은 기적으로 이어지는 삶이라할 만큼 극적 사건이 허다하다. 한 예로 일제치하 이른바 만주 만보산사건(滿洲 萬寶山事件)으로 알려진 열차 습격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열차를 타고 가다가 변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5시간이나 총격전이 벌어지는 생사의 기로에서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요란한 총격전이 멎고 조용해져서 눈을 뜨고 살펴보니 승객 거의가 죽었는데 그가 탄 객실의 사람들만 무사했다고 한다.

또한 그 어려웠던 일제치하에서 강요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행위였는데 그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령이 발부되어 지명 수배자가 되었다.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신사참배 거부 운동과 일제 관원의 탄압이 거세게 전개되었고 문기선은 변호사이기 때문에 더욱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아야 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문 장로를 만주 땅으로 피신시키시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에게 복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