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헌신의 동기

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붙은 긴 겨울날의 추위가 물러갔다. 온 누리에 따듯한 봄이 와 개나리 꽃, 진달래꽃이 온 산천을 한바탕 물을 들이고 지나 간 뒤에 목련 꽃이 피었다 지고, 장미꽃이 마당가에 붉게 피어났다.

여진헌은 이런 아름다운 계절인 1924년 5월 15일에 함양 여(呂)창언 씨와 모친 송삼덕 씨의 4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본적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 88번지이었지만, 그의 고향은 아버지의 본가인 황해도 수안군 정암면 보전리 355번지로, 산천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산골마을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도 싸운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화해정신이 뛰어났다. 그는 6살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8살에 이웃 마을에 있는 보통학교에 들어가 1937년 14살에 졸업했다. 그는 공부가 좋아 읍에 있는 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지만, 가난한 가정형편에 진학을 포기하고 가정 농사를 도왔다.

그가 21살이 되는 1944년 10월에 일본군 징집영장이 나왔다. 이때 징집되면 일본이 점령한 남양군도에 배치되어 연합군과 싸우다 총 받이로 죽는 개죽음뿐이었다. 그는 형들의 제안으로 뒷산의 작은 굴에 들어가 고구마와 미숫가루를 먹으며 몇 달간 숨어 지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왔다. 그는 굴에서 나와 보름동안 정양한 후, ‘민호단’이라는 사회사업단체에 들어갔다.

평양역에 가면 날마다 북만주에서 고향땅으로 돌아오는 귀국 동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는 이 사람들을 안내하며 돕는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때에 만주에는 발진티푸스 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평양역에서 매일 만나고 함께하던 만주에서 돌아 온 사람들로부터 그는 발진티푸스 병원균에 감염되어, ‘민호단’의 동료 세 사람과 함께 병원에 입원하였다.

매일 40도를 웃도는 고열에 시달리던 동료 두 사람은 찬물을 몰래 먹다가 그만 낯선 외지에서 쓸쓸하게 죽어 갔다. 그는 고열에 몸부림을 치면서 괴로워하며 하루에도 여러 번 씩 닥쳐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기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했다.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국 죽어야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그의 내면에서 올라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아, 하나님, 날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날 살려주세요!” 그때부터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더 열심히 찾고 부르짖었다. “하나님! 저를 이 병에서 살려만 주신다면 하나님께 저의 일평생을 바쳐 헌신하겠습니다.” 그는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을 매달려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굳게 서원했다.

그 결과 그의 몸에 고열이 차츰 차츰 내렸고, 치료한지 3개월 만에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퇴원하였다. 그는 자기를 살려주신 분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고, 가까운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 지역은 점점 공산화 되고 있었다. 주일 오전 예배시간에 근로동원을 내려 신앙인들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갔다. 신앙생활에 위협을 받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1947년 5월에 월남을 단행하였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