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복교회의 개척과 섬김

1950년 10월 5일부터 라복리에는 6칸 집에 규암교회 기도처가 마련되었다. 목요일이면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주일 밤과 삼일 밤에는 규암교회가 멀어 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다. 1958년부터 라복교회 건축이 시작되었다. 1961년 교회 건축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성도의 숫자가 70명에서 100여 명까지 늘었다.

성도들의 모임이 커지고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게 된 라복교회는 교역자 파송을 요청하여 1961년 3월 서울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윤영기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그때부터 라복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던 성도들은 모든 예배를 라복교회에서 드렸다. 이때부터 라복교회는 규암교회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당시 교단 분열의 와중에 전준기 장로와 윤 전도사를 비롯하여 전교인들은 1965년 제1차 교단 합동 시에 규암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성을 탈퇴, 기성으로 돌아왔다. 전 장로의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라복교회를 섬기던 윤 전도사가 1961년 군에 입대하자, 여동생인 윤수영 전도사가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윤수영 전도사는 은사가 충만한 교역자여서, 라복교회의 성도들은 교역자의 가르침 따라 신앙이 뜨거워졌다. 신자들은 자주 교회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심야기도회도 자주 했다. 또 전준기 장로의 여동생 전순기 집사가 윤수영 전도사와 기도의 동지가 되어 교회 일에 열심으로 충성하여 라복교회의 영성을 심화시키고 증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윤영기 전도사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다시 라복교회에 재 부임해 왔을 때는 교회가 많이 달라져 있었고 새로워져 있었다. 기도는 뜨겁게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하였으며, 찬송을 부를 때는 박수를 치며 불러, 성도들의 신앙이 열기가 충만해 있었으며 성도들도 많아졌다. 전준기 장로의 기도는 얼마나 열정이 있었는지 추운 겨울인데도 코트를 벗어놓고 두 손으로 의자를 꼭 잡고 큰 소리를 내고 기도했다. 그래서 그의 기도소리에 교회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고 다른 신자들도 그 소리에 지지 않을 만큼 큰 소리로 기도해 신앙이 담대해졌다.

1961년 5.16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 설 즈음, 라복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할 시기에 전 장로는 법무부 보호위원으로 피선 되었고, 이듬해 1962년에는 관직의 길이 크게 열리는 서곡이 되는 ‘대통령 녹조훈장’을 수상하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했다. 과연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는 은산면에 근무하다가 부여군 내무과장으로 일약 승진 발령을 받았다.

그는 부여군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주일 낮 예배는 라복교회에 가서 예배 드렸지만, 기타 공 예배와 매일 새벽예배는 부여중앙성결교회로 출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이때 부여중앙교회의 담임목사는 홍종현 목사였으며 성도들의 숫자는 30여명 정도였다. 이 시기에 부여 읍내에서는 ‘전 장로가 다니는 부여중앙교회를 다녀야 한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가 몇 단계를 뛰어넘는 일약 승진이 큰 화제가 되어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 왔다.

백제대교가 준공되어 부여 외곽에서도 신자들이 몰려와 부여중앙교회는 2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홍종현 목사의 리더십과 전 장로의 사회적인 명망,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와 전도의 열기로 교회는 급성장하여 부여군에서 가장 큰 교회로 부흥되었다. 당시 부여읍 사람들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잘되려면 전 장로가 다니는 교회에 가야한다’는 말이 계속 열풍처럼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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