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경 위의 등불 넘어 횃불 같은 삶

1973년 5월 부여군 농지개량조합장으로 자리를 옮긴 전준기 장로는 관직에서 부여지역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게 되어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1974년 5월 그는 서울신학대 재단이사로 피선되어 교단 신학의 요람인 서울신학대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이듬해인 1975년 5월 충남지방 장로회장에 피선되어 장로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충남장로회장을 연임하고 있을 때의 일화가 있다. 장로회 정기모임에서 장로들의 질적 성장을 위해 서로가 연구 과제를 발표하고 함께 토론회를 종종 가졌는데 이때 어느 장로가 ‘교회에서의 장로 직분’을 말하면서 ‘장로의 직분은 목회자의 목회독주를 견제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장로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장로의 직분은 목회자를 잘 섬기고 목회자의 목회를 돕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은혜롭게 발전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발언하였고 연구발표가 의미있게 진행되었다.

그는 1975년 5월, 교단 총회에서 회계에 피선되자, 군수와 내무과장의 경험을 살려 교단 살림의 내실을 기했으며, 충남 지방회 부회장과 장로로 기독교 부여군연합회장에 피선되어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매일의 기도제목 중 하나가 부여지역의 복음화였다.

그러던 차에 연합회장이 된 그는 부여 전 지역의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부르짖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연합집회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그의 활동으로 부여군 기독교연합회가 크게 활성화 되었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부여 라디오 방송국 근처 솔밭 강변에서 부여군 연합집회를 개최하였다.

부여군 연합집회는 교파를 초월해서 부여군 모든 교회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하며 모였다. 한국의 이름있는 부흥사들이 토해 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회 열기는 항상 뜨거웠으며 성령의 임재가 늘 충만했다. 이때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 주의 종이 된 사람들이 많아 한국교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금 초교파적으로 부여 지역 출신 교역자들이 많은 것도 이때 섭리하신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당시 각 교회에서 온 성도들은 강변에 포장을 치고, 솥을 걸어 밥을 해서 서로 나누어 먹으며 친교를 다졌다. 교회가 다르면 좀처럼 만나기가 힘드는데, 성도들은 이런 기회에 서로 사귈 수가 있어서 함께 기도하며 지역복음화를 위해 힘쓸 수 있어서 좋았다.

예수께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느니라”(마 5:15)고 하신 말씀처럼 그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등경 위의 등불처럼 세워지고 쓰임 받은 하나님의 도구였고, 한 시대 지역복음화에 사용된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는 대전을 비롯한 충남 남서부 지역에서 횃불처럼 타오른 열정적 복음의 일꾼이었다. 특히 부여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 복음의 설득력을 저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불붙여주는 성령의 불씨 역할을 다하였다. 

하나님은 지역 주민들과 몸을 가깝게 부딪히면서, 마음을 나누면서, 눈에 잘 뜨이고, 입술에 오르내릴 수 있는 공직의 등경위에 그를 두어서 그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밝히게 했다. 삶으로 보면 그는 크고 넓은 폭의 삶을 살았고 공직생활의 모든 과정과 결실을 통해서 조용히 타오르는 등불을 넘어선 횃불 같은 존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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