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총회장이 되어 기념사업 이끌다

이중태 전도사가 1960년 총회에 목사안수 청원을 했을 때의 일이다. 이 전도사가 목회경력이 없다며 반대하는 회원이 있었고 결국 담당부서에서 결정을 못하고 총회 통상회의에 내놓았다. 찬반격론 끝에 참석자들은 담임인 배문준 목사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이때 배 목사는 “이 전도사는 특수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찬양으로 나의 목회를 도와서 일했고, 일주일에 하루는 심방을 하였고, 일주일에 한 번 설교하였고, 열심히 목회에 협력했습니다. 그는 찬송을 잘 가르쳐서 성도들이 찬송의 능력을 받고, 충성된 교회일꾼이 되고, 복을 받은 교인을 만든 훌륭한 음악전도사입니다”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회원이 “그는 결과적으로 담임목사님께 협력하여 목회를 했으니 안수를 주기를 동의합니다”하니 동의가 가결되어서 안수를 받았다.

배 목사는 우리 교단에 공적이 많은 보배였다. 청주서문교회에 부임한 후에는 충청지방회장과 충북지방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방회 발전에 공적이 많다. 1953년 서울신학대학 운영인사로 섬겼고 1957년 교단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년에 서울신학대학 부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61년에 서울신학대학 재단이사를 한 후 1962년에 총회장에 재선되었다. 또 1965년에 서울신학대학 유지재단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7년 그가 처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성결교단 희년의 해였으므로 여러 가지 기념행사와 사업을 감당해야만 했다. 제9회 총회에서 희년기념사업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는데 당시 희년기념사업 준비위원으로 배문준 이명직 김창근 강송수 오영필 이용선 안창기 등 27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에 의해 추진된 희년 기념사업으로는 희년기념관 건립과 기념출판사업, 희년전도대 운영, 희년기념식, 교회교육 발간 등이 있다.

가장 큰 희년사업은 희년기념관 건립으로 성결교회는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세례교인 1인당 100환씩 모금하도록 추진했다. 동양선교회의 지원과 전국교회 및 유지의 협조와 중앙교회의 협력으로 3000만환을 들여 1957년 9월 1일에 서울시 중구 무교동 12번지 중앙교회 장소에서 기공하고 9월 30일에 정초를 놓았다. 1년여의 공사를 거쳐 1958년 12월 1일에 준공된 희년기념관은 1249㎡(378평)으로, 1층은 총회본부가 2층은 중앙교회가 사용하였다.

또한, 1·4 후퇴 때 부산에서 ‘활천’속간 및 기타 서적의 출판을 위하여 설치했던 인쇄시설을 부산공장으로부터 서울신학대학 지하실로 옮겨 희년기념 출판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 일제 때 발행했던 성서영해전집, 창세기 영적 연구, 개인전도학, 헌법, 성결론, 휴거론, 재림의 복음, 구약4천년사 등이 중판되었고, 교단중진 50명이 집필한 희년설교집을 출간했다.

희년을 계기로 전국 전도를 펼치기 위해 ‘희년 전도대’도 결성되었다. 대장은 당시 한국의 무디로 별칭이 붙은 이성봉 목사를 중심으로 전도대가 꾸려져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했다. 부대장 이정률 목사, 총무 정운상 목사, 대원 임원상 목사 등은 전국적으로 전도했는데 성결교회 초기 장막전도를 방불케 하는 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다.

희년기념식은 1957년 4월 28일 오후 2시 서울신학대학 교정에서 각 교파와 연합회, 기관대표, 남여교역자와 평신도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장 배문준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이명직 목사의 희년기념사에 이어 동양선교회대표 에드윈 A. 길보른 선교사의 선교 50년 회고, 대만선교사 웃스(Woods)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희년기념식에서 공로자표창이 있었는데 30년 이상 근속자로 열아홉 분의 목사와 네 분 여전도사가 표창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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