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교 입학과 첫 목회의 시작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넘어온 여진헌 청년은 한동안 북녘에 두고 온 부모님이 생각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를 버리고 자기 혼자 살려고 38선을 넘어온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부모를 생각하면 현실의 모든 것을 접어두고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했다.

그는 성경을 날마다 읽고 또 읽으며 말씀의 깊은 뜻을 찾아 은혜를 받았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하면서 그는 이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 마침내 그는 목사님의 권고와 추천에 따라 1948년 9월, 서울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울신학교의 학제가 변경되어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신학교는 이때부터 4년제의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공부는 그의 신앙에 틀을 잡아주었고 시간마다 듣는 강의는 꿀송이 같아서 그의 신앙인격을 조화시켜 성숙하게 해 주었다. 신앙이 신학으로 뒷받침 되었을 때 그의 신앙은 확고해졌고, 교역자의 사명감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의 공산군이 대대적 남침을 한 것이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조국의 현실은 모든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남한의 국군은 계속 밀려 서울을 버리고 수도가 대전, 대구, 부산으로 옮겼다. 그는 선배교역자들을 따라 기차, 때로는 하루 수백리 길을 걸어서 부산까지 내려가서 피난민 생활을 했다. 그는 국가의 풍전등화를 겪으면서 자진하여 유엔군 부대에 입대하여 군인생활을 했다. 덕분에 영어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다.

1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51년 8월, 부산피난신학교에 복교했지만, 당시 피난신학교의 교실이 부족해서 졸업반인 4학년생들은 일선의 교회를 맡아 일 년간 사역하는 것으로 교육을 대체했다.

그는 1952년 4월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했다. 여진헌 전도사의 첫 목회지가 충남 보령군 청소면 진죽교회였다. 총각전도사인 그는 개척교회인 진죽교회를 섬기면서 자취생활을 했다. 이때 치리목사인 천안교회 최창도 목사가 그에게 독신으로는 목회한다는 것이 어려우니 어서 결혼을 해야 한다며 서둘러 중매했다.

마침내 그는 최창도 목사의 중신으로 경주가 본인 정만업 씨의 장녀 정원주 처녀를 맞아 1952년 4월에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신부의 나이는 22살 꽃다운 규수였다. 나중에 정원주 사모는 이때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청주 서문교회 신문에 간증문으로 실었다.

“최창도 목사님이 중신을 하면서 신랑감인 여진헌 전도사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을 들어보니 북한에서 월남하여 가족이 없었다, 신학생이라고 하고 시골에 있는 전도사라고 해서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며칠을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교회 강단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자신의 생각으로는 결정 할 수 없는 자신의 결혼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했다.”고 했다. 그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바로 고린도 후서 6장1절로 10절의 말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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