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의 삶과 그를 기리는 송덕비

전준기 장로는 공직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마저 다하지 못한 일을 하듯 더욱더 열심히 섬김과 봉사의 삶을 실천했다. 1978년 5월에 인수회장에, 이듬해 9월에는 부여군 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80년 11월에는 YMCA클럽 부여회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1981년 4월에는 부여박물관 회장에 취임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였으며 1981년 5월에는 교단 부총회장에 피선해 교단 부흥과 발전을 위해 헌신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국가의 공직을 명예롭게 은퇴한 그의 여생은 자신의 영성을 더욱 강화하는 삶을 위해 새벽 2~3시에 일어나 기도와 성경과 명상으로 하루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와 주의 종을 위하여, 믿지 않는 이웃들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또 시간 관리를 잘했는데, 공직생활을 하면서 몸에 배었던 시간개념은 철저히 지켜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하루 일정을 계획했다. 또한 사회적인 공인에서 한 개인의 삶으로 돌아와 교회를 섬기면서도 장로로서 직임에 충성을 다했고, 성경과 경건서적을 늘 탐독하여 자신의 경건생활을 위해 늘 충실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므로 경건한 가문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의 호는 성제(省齊)다. ‘성’자는 볼 성, 살필 성이다. ‘제’자는 다스릴 제, 정제할 제, 가지런할 제, 빠를 제, 씩씩할 제, 나라 이름 제, 엄숙할 제, 공손할 제, 고를 제, 화(和) 할 제, 정결할 제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전준기 장로는 ‘성제’라는 호를 짓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고 옥편을 찾았을 것이다.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그리며,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꿈꾸며,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자신의 호로 정했을 것이다. 마치 이마에 두른 띠에 기록된 슬로건처럼 그는 ‘성제’가 되기 위해 몸부림 쳤다. ‘성제’라는 두 글자 속에 들어있는 자신의 푯대를 바라보며, ‘성제’의 호 그대로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하며 하나님께 뜨거운 기도를 했을 것이다.

‘성제’라는 호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항상 자신의 호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다. 자신을 먼저 살펴보고, 다스리며, 정제하고, 가지런히 하며, 민첩하게 하고, 씩씩하게 하며, 엄숙히 하고, 공손하게 하며, 고르게 하고, 화(和)하게 하며, 정결케 한 그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서 자기를 이기고, 끝까지 자기를 갈고 닦고, 자기를 지킨 삶을 통해서 그는 주어진 자리의 어둠을 밝히는 큰 횃불의 삶을 살았다. 그가 쓴 저서로는 ‘충효사상’, ‘라복교회사’, ‘성제산고’, ‘부여군지 인물편’ 등이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전준기 장로의 송덕선정불망비가 충남 남서부 지역 일원에 무려 40여 곳에 산재해 있다. 주민들이 세운 비석에는 군수로서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칭송의 내용들로 빼곡하다. 그 중 여섯 곳에 세워져 있는 송덕선정불망비는 출생지인 당촌동 어귀와 규암초등학교 앞, 의열사 뜰, 임천면 군사리 입구, 전 부여 노인회관 옆, 장암면 합곡리 국도변에 있다.

2000년 11월 9일, 82세를 일기로 전준기 장로는 평신도의 선봉에 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승리의 입성을 했다. 하늘나라로 간 전준기 장로는 이 땅에 비록 살고 있지 않지만 그를 기리는 많은 송덕선정불망비가 말없이 비석을 보고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주민을 사랑으로 섬긴 한 그리스도인 군수의 삶의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영원한 메아리가 되어 후세에 남겨지고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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