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생활의 본보기 장로 군수

 부여군 내무과장으로서 지혜로운 직무수행을 통해서 부여중앙교회의 부흥에 일조를 한 전준기 장로는 1966년 6월 청양군수로 승진하였다. 1년 반 동안 오지라고 말할 수 있는 청양군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전 장로는 1967년 12월 고향인 부여군의 군수가 되어 금의환향 했다. 이후 고향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1969년 7월까지 부여군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은 후, 1969년 7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서천군수로 전임되어 서천의 발전에도 힘을 다했다.

그는 1970년 3월에 고향인 부여군수로 다시 돌아와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인근 지역에 기독교의 복음에 호감을 갖도록 많은 본을 보였으며, 미신자인 군민들이 기독교의 복음에 관심과 함께 공감하도록 장로로서의 모범을 몸소 실천하는 군수로 활동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생겨난 일화는 많다.

그가 지역의 관공서를 순회할 때는 지역의 작은교회마다 반드시 먼저 들러 기도를 했다. 이때 전 군수가 교회에 들어가면 군수를 따르던 모든 직원들도 함께 교회에 들어가 군수의 기도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교회를 사랑한 그의 마음과 전도의 지혜를 통해서 시골의 많은 교회들이 우상이 만연된 어두운 곳에 부흥의 전기를 만들곤 하였다. 출장 시에 면장이나 읍장들을 만나면 반드시 전도를 해서 교회에 다니도록 했다. 후에 그는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군수로 있을 때 전도하지 않으면 언제 전도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신 것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수요일 밤이나 주일 밤에는 일부러 시골에 작은교회를 찾아 가서 간증전도를 했다. 당시만 해도 군수는 대단했다. 군수가 시골에 나타나면 면장이나 면 직원들은 물론 그 마을의 유지들까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작은교회에 찾아와 저녁예배에 참석했다. 그들 중에는 전 군수의 간증과 전도설교에 큰 감화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군수로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한 신앙인으로서 최선을 다했으며, 또한 공식적인 군내 행사를 참석해도 항상 목사님들을 상석에 예우하고 공손히 경어를 쓰고 높임으로서 지역 공무원들이나 군민들에게 교회의 위상과 목사님들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전준기 장로의 신앙적 인격과 지혜로운 간접전도로 그가 군수로 재직하던 곳마다 기독교와 교회의 사회적인 위상을 높였으며, 목회자에 대한 사회적인 예우도 따라서 높아졌다. 그래서 그의 공직생활을 함께 한 교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전준기 장로를 인정하고 감사했다.

그가 1971년 8월부터 1972년 6월까지 충남도청의 도로국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국가의 시책에 따라 지역마다 도로를 확충하던 때여서, 도청의 도로국장 자리는 돈을 모을 수 있는 부정축재의 온상이었다. 그곳은 사업자들이 뇌물공세를 펼치던 돈방석의 자리였다. 그에게 몇 번의 청탁과 뇌물의 유혹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중앙정부 고관의 친인척들이어서 대개 그 청탁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득죄할 수 없었던 요셉처럼 단호히 그런 청탁을 거절하자, 남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청탁을 거절당한 사람들은 전 장로에 대한 미운 마음에 중상모략이나 근거도 없는 험담을 했다. 그의 이런 결백함은 나중에 당진군수로 좌천되는 요인이 되었고 또 나중에 부여군 농지 개량 조합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도 사실은 당진군수 재직 시에 정부고관들의 친인척이 불법으로 토지를 매입하려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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