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되어 첫 목회지 비인교회에서

배문준 목사는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최광리 322번지에서 부친 배중록(裵重祿)씨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1897년에 11월 27일(음력)에 태어났다. 대대로 미신을 유별나게 섬기던 집안인데다가 부친은 말술도 사양하지 않고 즐겨 마셨던 관계로 문준은 어렸을 때부터 술과 미신에 의한 폐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 그것들을 증오하면서 성장했다. 그가 전 생애를 거의 충청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충청도 태생으로 오인했다.

노경에 배 목사의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아니 젊었을 때도 머리가 희었다고 한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얼굴은 홍안소년과 같이 붉고 건강한 화색으로 인해 종종 그보다 연령이 더 많은 분과 자리를 같이 했을 때에도 흰머리 때문에 좌장으로 인정을 받았다면서 웃음을 터트릴 때가 있었다 한다. 배 목사는 노소동락하여 나이 많은 자세를 하지 않고 젊은이들과도 잘 어울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친숙하게 지냈다.

배 목사는 화초를 잘 가꾸었는데 이런 우아한 취미와 성격이 이런 정서도 갖추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배 목사의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한 목회자의 생활이었으나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40여 년 간을 훌륭하게 목회와 크고 작은 교단의 일을 무난히 수행했다.

배문준 목사는 1922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고 그해 경북 군위군 비안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비안교회는 군위교회의 청년들이 전도대를 조직하여 각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전도한 결과로 설립하게 되어 총회에서 신학교를 갓 졸업한 배문준 전도사를 파송했다.

1928년 배 전도사는 전국교회의 협력으로 예배당을 신축하고 8월 20일부터 새벽기도회를 열어 모든 신자들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의 불이 붙으니, 새로운 신자들이 우후죽순 파죽지세로 생겼다. 당시 비안교회는 68명의 장년신도와 102명의 주일학생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전도를 받은 이 가운데 한 분이 역촌교회 박희순 원로장로다.

교회가 날로 부흥하는 가운데 비안에서 2km 떨어진 외곡동(外谷洞) 마을에 기도소를 세웠는데 30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또 비안교회는 지방연합전도대의 집회 때에 타락했던 신자가 다시 돌아오고 교회가 부흥되어 화실(花實)이란 동네에 지교회를 설립하여 20여명의 신자가 모이고 있었다. 이처럼 비안교회는 지역 교회 개척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었다.

배문준 목사는 1932년에는 충남 홍성 금당리교회로 전임되고 1933년 4월에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금당리 교회는 글자의 뜻과 같이 금보다 보배로운 신자가 많아 주일이면 바쁜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서 책보를 끼고 삼삼오오로 아이를 업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교회로서 총회에서 이상적인 교회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어 배 목사는 1935년 전북(지금의 충남) 금산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했고 1936년에 청주교회로 파송되었으며 4년 후인 1940년 11월 조치원교회로 부임하였다.

배 목사가 부임할 당시 조치원교회는 2년 사이에 목회자가 2번이나 바뀌면서 교우들은 불안정 속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고 목자 잃은 양과 같았기에 배 목사의 부임을 무척 환영하며 반겼다. 윤음전 도사와 함께 열심히 목회하는 가운데 성전을 증축하고 후에 사택을 건축하며 은혜로운 분위기로 교회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 후 조치원교회는 1943년 5월, 충청지방에서 최초로 신기철 양정석 두 집사를 장로로 세웠고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과 핍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일제는 교회 헌금을 약탈해 갔고 교회를 수시로 감시했다. 나중에는 교단과 교회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는데 조치원교회 역시 강제로 폐쇄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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