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분열의 회오리 속에서

희년 기념사업으로 성결교회는 성청장학관 건립과 교회교육 발간을 진행했다. 독립문 옆에 마련한 성청장학관은 농어촌 교역자와 평신도의 자녀들을 기숙 지도로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교회교육은 각 기관에서 발행하던 기관지를 통합하여 교회교육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또 희년사절을 미국에 파견하는 등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57년에는 100여개 교회가 증축되었고 119개교회와 4만여 신자가 증가하는 등 성결교회는 대대적인 발전기를 맞았다. 창립 이후 47년간 871명의 교역자를 배출한 서울신학대학도 크게 발전하여 당시 231명의 재학생이 수학 중에 있었고 신생부인회와 남전도회, 성청, 주일학교가 계속 발전하고 군목의 선교활동과 교육사업과 구호사업에 이르기까지 희년을 기해 줄기차게 발전하였다.

해방 이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분열로 진통을 겪었다. 이 교단 분열의 회오리가 1962년에 성결교단에도 휘몰아쳤다. 성결교회 안에 기독교연합회(NCC)와 복음동지연합회(NAE)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NCC는 연합운동기관이고 NAE는 순전히 신앙운동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변함에 따라 NAE도 정치단체와 같이 변질되었다. 교단이 분열의 위기에 빠지게 되자 1960년 4월 총회에서 두 기관을 동시에 탈퇴할 예정이었으나 불행히도 4.19가 터져 부득이 총회는 정회되고 말았다.

5월 20일 대전에서 속개된 총회에서 두 연합기관의 탈퇴를 투표에 붙였는데 탈퇴를 보류하자는 안이 가결되어 탈퇴를 보류하였다. 1961년 제16회 총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으나 지난 총회에서 결의한 탈퇴보류를 재론하지 말자는 안이 가결되었다. 그러자 탈퇴를 주장했던 분들이 결국 총회를 나가 예성교단을 세워 성결교회는 분열되었다.

교단이 분열된 1962년 제17회 총회에서 배문준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총회장에 선출된 배 목사는 교단합동을 위해 서신으로, 혹은 직접 찾아가 격려, 설득하는 등 온힘을 쏟았다. 그는 청주에서 새벽차를 타고 상경하여 교단 수습을 위해 각 지방으로 동분서주하여 노경에 휴식시간을 차안에서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덕망이 높은 배 목사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항상 놓여 있었다. 배 목사는 교단분열의 과정에서 피차 모략중상, 법정소송, 교회쟁탈전 등 추태를 연출할 때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부덕으로 자인하고 하나님 앞과 전국교회에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하며,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고 괴로운 심정을 18회 총회 개회사에서 토로했다.

그가 총회장 재임 동안에 이탈했던 많은 교회들이 돌아왔다. 그는 분열의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말고 우리 각자가 책임을 통감하고 피차 근신하고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을 본받아 과거보다 가일층 사랑과 온유로 응대하기를 힘쓰며, 과거를 한하지 말고 피차 시비를 지양하고 합동통일의 길로 매진하여 교단 본연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힘쓰자고 호소했다.

그러한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분열되었던 교단은 1965년 7월에 합동을 했다. 그때 합동된 전체교회수가 525개 교회였다. 기성 391개 교회, 예성에서 129개 교회, 중립 5개 교회였다. 당시 관망 중인 교회가 18개 교회, 합동하지 않고 잔류한 교회가 70개 교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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