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섬 교회를 자청하여 출발한 목회사역

김창근은 경성성서학원 2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다가 1931년 5월에 졸업했다. 그의 졸업 동기생은 한성과 교수, 차창선 목사, 그리고 전혜완 전도사 등 모두 16명이었다. 그는 졸업하기 전 아현교회 이기봉 장로의 장녀 이경숙 양과 결혼하였으며 졸업과 동시에 대전교회 부임전도사로 파송 받아 대전교회 주임목사요, 충호지방회 감리목사인 김응조 목사 밑에서 첫 목회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이듬해 감리목사인 김응조 목사에게 자청하여 교역자들이 가기 싫어하는 전남 신안군의 섬 교회를 자원했다. 이는 목회의 시작을 어렵고 힘든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나중에 목회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뜻을 가상히 여긴 김응조 목사는 1932년 3월 그의 첫 목회지를 전남 신안군 암태면 도창리 암태교회(현 암태 도창교회)로 파송한다.

그는 곧 아내와 함께 목포에서 돛을 단 배를 타고 4시간 만에 도착했으나 아내는 심한 멀미로 토하며 거의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 섬 목회 고난의 첫 모습이었다. 암태교회는 1931년 암태 도창리 출신 김흥기 청년이 목포북교동교회 이성봉 전도사에게 은혜를 받고 돌아와 마을을 전도했는데, 후에 북교동교회가 지교회를 세워 신자들 100여명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는 사중복음 중심의 말씀으로 신자들을 잘 양육하였고 그가 암태에서 목회한 지 3년 만에 암태에 2교회, 자은에 2교회, 도초와 안좌에 각각 2교회 등을 세웠다. 그는 험한 바닷물을 자그마한 배를 타고 건너다니며 집회를 인도하고, 결심자들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당시 경성성서학원 학생인 문준경 전도사가 개척한 임자와 증도의 교회들과도 협력관계가 이루어졌다. 즉 1930년대 신안군 동쪽의 섬마을 교회들은 문준경 전도사가, 서쪽의 섬마을 교회는 김창근 전도사가 개척한 것이다.

그의 도서지역 개척의 공로가 인정되어 김창근 전도사는 대전교회의 주임교역자로 발령 받았다. 그것도 충호지방 감리목사가 시무한 교회를 전도사로서 임명되는 파격적 발령이었다. 1919년 4월 한 방앗간에서 시작한 대전교회는 서서히 부흥하여 김응조 목사 재임시 성전도 짓고, 성경학교도 개설하여 충청 호남지역의 성결교회 센터 역할을 했다.

큰 교회의 사명을 맡은 김창근 전도사는 1937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를 더욱 알차게 부흥시켰다. 그는 6.25전쟁 중이던 1951년까지 대전교회에 18년 간 시무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여 질적, 양적으로 큰 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자리 잡은 중부지역에 성결교회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성결교회의 붐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장년신자 5백명이 육박하자, 교회 개척 사명이 대전교회에 있음을 일깨워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매진하게 했다. 그리하여 1936년에 유성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충북 영동읍에 영동교회(1937), 공주읍에 공주교회(1940)를 개척하는 등 힘을 다했다. 그리고 대전고등성경학교를 세워 사명 있는 평신도를 가르쳐 목회자로 세웠다. 헌신의 목회사역 과정에 그의 활동영역이 점점 커져 1937년에는 충청, 호남지역의 순회목사, 1940년에는 일본 한인성결교회 순회목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모든 정책을 전쟁수행으로 밀고 나가 물자의 궁핍과 함께 기독교 탄압을 노골화했다. 그는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연설하라는 부탁을 거절한 죄로 일주일 동안 수감되어 심문을 받고 석방되자마자 고문 후유증으로 몸져 누었다. 전쟁수행에 혈안이 된 일제는 기독교를 더욱 억압했다. 그 중 성결교회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1943년 교직자 검속 때 다시 수감되어 고난을 또 다시 겪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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