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기 장로 출생과 젊은 시절의 삶
일제의 식민지에서 한국인들은 몹시 고달팠다. 특히 농촌의 실정이 더욱 암울하고 피폐했다. 1918년 8월 10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라복리 578번지에서 전준기(田俊淇)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담양이 본관인 전일용 씨였고 어머니는 황마리아였다. 4남 3녀 중에 둘째아들로, 무더운 여름철의 한복판에 그는 이 땅에 보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일이 되면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집에서 10여리 되는 들길을 걸어 규암교회를 출석하였다. 어머니는 전통적인 유교가문인 전 씨 집안에서 맨 먼저 예수를 믿고, 그 복음의 씨앗을 가정에 심었다. 어머니는 교회의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후, 이름을 마리아로 개명할 정도로 믿음이 대단한 분이어서 준기는 그 영향을 받으며 믿음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시절에 병으로 먼저 천국으로 가셨다. 그의 나이 13살, 사춘기 시절에 접어든 시기에 철저하게 의지했던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 속에서 준기는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17살이 되었을 때 신앙의 중요성을 깨닫고, 1935년에 규암교회에 다시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년 뒤인 1936년 3월 10일에 학습을 받았고, 1937년 10월 5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40년 1월 10일, 그의 나이 불과 23살에 집사의 직분을 임명 받고 교회를 섬기는 충성된 일꾼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 딛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기 때문에 한학에 관심이 깊었고, 또 한시(漢詩)를 짓고 읊을 정도로 실력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시로 한시나 운문 등을 붓글씨로 써서 액자를 만들어 친지들의 생일이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선물했다. 그런데 그의 서예 솜씨가 상당하여 부여의 사람들에게는 큰 인기가 있었으며, 또 그는 감수성도 민감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면 시심(詩心)이 우러나 즉시 시를 지어 노트나 붓글씨로 쓰기도 한 무명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유교적인 의식이 강했고 이 유교적인 소양이 기독교 은혜를 받은 뒤에는 기독교적인 소양으로 바뀌어 기독교 윤리사상을 견고하게 해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어른이나 스승에 대해 철저한 유교적 예절이 그가 교역자를 섬기는 예의를 갖추는데 기초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몇 년 간 혼란의 시대를 겪으면서 그는 더욱 더 한학에 열중하고 독학 자습하면서, 격동하는 현실을 헤치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기도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그는 규암면의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십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길가에 핀 들풀과 들꽃의 풋풋한 향기를 맡으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 것을 꿈꾸었다. 이 꿈은 어린 시절부터 들어 온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늘 ‘이 고을에 큰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1949년 4월 1일 홍익대학교 법정학부 법률학과에 입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겪었지만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1954년 3월 31일 졸업하였다. 그는 공무원의 세계에서 더욱 정진할 것을 결심하고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였다. 1960년 2월 16일 전준기는 당시 김용련 목사님이 시무하는 규암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되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