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근의 성장과 신앙의 시작

김창근(金昌根) 목사. 옛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그에 대해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NCC의 추종자로, 1960년 교단의 분열을 한 축에 선 사람이라는 부정적 견해다. 또 다른 하나는 사중복음의 주창자로, 복음을 사회로 넓게 확산하기 위해 교회행정, 교육, 복지사회 건설에 힘쓴 선구자였다는 긍정적 평가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편견 없이 그의 장·단점을 모두 소화하여 부정적인 면은 이해하고 극복하면서, 긍정적인 면은 적극 활용하므로 개인은 물론, 교회의 발전과 활성화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여기 그의 생애와 일화를 통해 그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조선말 5백년의 역사가 풍전등화와 같던 1907년 1월 27일 몹시 추웠던 그날, 그는 경북 합천군 대양면 오산리 마을의 유명한 한학자 김영함 씨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나면서부터 유달리 키가 작았으나 똘똘하고 영민하여 성장하면서 아이들을 휘어잡는 지도력을 보였다. 4살 때 늦여름의 어느 날, 그가 큰 느티나무 그늘에 갔더니 그곳에 마을 어른들이 모두 모여서 웅성대다가 갑자기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며칠 전(1910년 8월 29일)에 조선이 일본에게 합방되어,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이 비통스런 날의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토록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남달리 영민하여 5살 가장 어린 나이로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에 다녀 천자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등을 13살까지 동료들 중 가장 먼저 수료하므로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12살 되던 그 해 3월에는 서울에서부터 조선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점점 번져 산골마을 이곳에도 남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느티나무 밑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창근이도 힘차게 만세를 불러, 그동안 나라 잃은 슬픔을 조금이라고 달랬다.

그런데 그가 13살 되던 어느 날, 읍에서 일본 경찰들이 마을에 와서 훈장과 유학자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 후, 마을 서당을 폐쇄조치했다. 그래서 그의 한학공부가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나라 없는 슬픔을 톡톡히 맛보았다. 그해 3월에 그에게 취학통지서가 나왔다. 읍에 있는 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라는 것이다. 신식 공부를 부친이 반대했지만, 그는 신식 공부가 궁금하고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부친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계속 졸라댔다. 그래서 13살 나이에 십리 길을 걸어 읍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반에는 창근이처럼 10살 이상 된 아이들이 10여명 있었고, 대개는 8살부터 10살짜리 동생들 같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처음에는 창피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공부했다. 처음 배우는 한글, 일본어, 산수, 도덕, 음악 등 신식공부는 한문보다 쉽고 아주 재미가 있었다. 그가 1학년을 우등생으로 마쳤더니 학교에서 다음 해는 월반해서 3학년으로 진급시켰다. 이렇게 보통학교 5년을 그는 두 번이나 월반해서 3년 만에 졸업하여 16살이 됐다.

그는 보통학교를 다니며 얻은 새로운 지식도 소중했지만, 더 귀한 것은 이 때 교회를 다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1학년 때 오전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다 길가에 있는 교회에서 우렁찬 찬송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회는 부흥사경회 중이었다. 마루 끝에 조용히 앉아 강사의 말씀을 듣다 그는 가슴이 뛰는 경험을 했다. 모세가 자기 민족이 애굽의 고달픈 노예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더니 민족을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그는 5척 단구였지만 하나님께 붙잡히면 큰일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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