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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촌을 찾아가서 북을 치며 찬송을 불렀더니 순식간에 남녀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곳에 모인 아이들은 가난해서 옷을 입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색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매일 갯벌에 가서 조개를 잡아 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 까닭에 햇볕에 그을렸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간국이 흐르는 떨어진 무명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곳의 전도결과로 5인의 신자가 생겼고, 신자들은 빈민촌을 전도지대로 삼아서 종종 전도하러 나아간다.하계 아동성경강습회를 열었는데 경성성서학원 수양생 민병순이 자진하여 아동집회를 개최했다. 그의 아동을 인도하는 능한 수완으로 불과 두 세 집회 만에 장소가 꽉 차서 80~90명에 달했다. 교수과목은 다니엘서, 룻기, 국문 등이었다. 두 주간을 교수한 과목의 시험을 치른 후 시상식이 있었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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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6.08.2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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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朴亨圭) 목사는 1901년 부여군 남면 대선마을에서 부친 박병욱(朴炳旭)과 모친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부친의 농사를 도우며 한학을 했다. 개화정신을 갖고 있던 그는 머리를 길게 늘이고 댕기를 땋고 다니다가 자진해서 머리를 잘라 조모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1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투옥되어 왜경의 심한 고문으로 업혀왔다. 그가 언제 기독교에 입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한국이 일본과 강제합방되어 국권을 상실했을 때 기독교가 방황하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세계관을 소개해 주는 복음이 되고 길잡이가 되었다. 1912년 부여규암교회가 설립되고 1914년 은산교회가 설립되어 규암교회나 은산교회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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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6.07.2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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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교회는 80평 예배실로는 1부, 2부 예배를 소화 할 수 없어, 큰 교회당을 새로 건축해야 했다. 그래서 1974년 4월에 착공해 1975년 4월에 헌당식을 했다. 총면적 1987평이 되는 웅장한 교회로, 4000명의 성도가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한 것이다.그러나 황 목사는 정년을 3년 앞당겨 1979년 1월에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신자들이 만류했으나, 새시대는 새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고, 후임자를 선임한 후 그해 9월 28일에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음으로 목회경력 40년의 대단원을 일단 마쳤다.그는 여생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미국 이민을 준비했고, 1979년 9월 30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미주에 도착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쉬지않고, 미주에서 할 일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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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16.07.0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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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기도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므로 아군이 북진을 계속하다 1953년 7월에 휴전되었다. 서울로 환도하자 부산은 차츰 안정이 되었고, 수정동교회는 영적 쇄신을 위해 새벽기도를 통해 은혜와 성결생활을 강조하여 은혜로운 교회로 알려졌다.그러나 1958년 8월에 황 목사는 부산 수정동교회를 사임하고 인천 송현교회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새벽기도를 강조하고 신령한 은혜설교와 은사집회를 실시하여 교회에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자꾸 늘어나 부임 3년 만에 교인수가 배로 늘었다.예전에 우리 교단은 교회연합체인 NCC와 NAE라는 두 기관에 가입되어 대표가 각각 파송되어 활동을 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58년 총회 때 러시아 정교회 대표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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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6.06.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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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1940년에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서울 마포의 신수동교회 담임전도사로 일하다가 1943년 3월에 졸업했다. 그런데 그 해 5월 24일에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이 일본 국시에 어긋난다며 전국에 성결교회 교역자 구속령을 내려 황성주도 용산경찰서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다가 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9월에 성결교회 예배 중지령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어 할 수 없이 고향 근처 점촌에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휴양하면서 동생 황용석 집사와 함께 강변 모래땅을 매입해 신망애 농장을 세워 농사지으면서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고 일제의 멸망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해산령에 따라 1943년 12월 29일부로 해산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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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6.06.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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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가 20살(1931년)이던 어느 여름날 판금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김천극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번화한 사거리에서 북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기에 호기심이 생겨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었다.“여러분. 오늘 밤 경성(서울)에서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님이 오셔서 인생의 소중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모두 우리와 함께 교회로 가셔서 인생의 기쁨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외치자, 두 사람은 호기심으로 전도대를 따라 갔다. 그들이 간 곳이 김천성결교회(남산교회)였다. 이 집회에서 그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고 예수 믿겠다고 함께 손을 번쩍 들었고, 강사의 권면에 따라 이튿날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모든 예배를 빠짐없이 다녔다. 그들은 6개월만에 학습, 또 6개월 후 세례를 받고, 일 년 만에 총각집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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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6.05.2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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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주는 1912년 7월 5일 충북 음성에서 출생했다. 당시는 5백년의 조선왕조가 일본의 침략에 의해 1910년 한일합병이란 미명으로 멸망 당한지 2년이 되는 때여서,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 설음과 울분을 마음속으로 삭이면서 지내던 암울한 시기였다.그의 본명은 황용주(黃龍周)다. 부친이 항열인 용(龍)자를 따라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친동생은 황용석 장로였다. 그들은 7살 때 부친을 따라 경북 김천으로 이사하면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김천에서 보냈다.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가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모태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조선시대의 명재상 황희(黃喜) 정승의 후예라는 자부심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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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6.05.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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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영 권사는 전도와 교회부흥에 힘썼다. 해마다 그녀의 전도로 30~40명이 새신자가 되어 등록했다. 1980년 10월 이순영 집사가 59세 때 채산교회 박재옥 목사는 전도 왕 이순영 집사 외 5명의 권사취임식을 거행했다. 그 때 그녀는 주의 일에 평생 헌신하겠다고 많은 사람 앞에서 서약을 한 후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했다.이순영 권사가 임직하고 5년 후에 그녀가 전도한 서창례 집사가 권사취임을 받았다. 그녀는 서창례 권사와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온 동네의 집집마다 방문하며 차근차근 전도했다. 심지어 관공서며 보육원까지 다니며 전도할 뿐 아니라 보육원 김장까지 담궈주었다. 아이들이 많을 때는 150명까지 보육원 교사들이 인솔해 채산교회에 데려와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이순영 권사가 처음 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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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6.04.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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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가게를 운영하려면 때로는 목돈이 필요해 그녀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계를 시작했다. 당시 목돈 마련을 위해 계를 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녀는 곗돈을 힘에 겹도록 부었다. 한참 계를 붓고, 그녀가 탈 차례가 되자, 계주가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큰 돈을 잃어서 슬픈데, 같이 계를 들자고 소개해준 사람들까지 집으로 몰려와 “내 돈 내놓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려 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시험이 찾아왔다. 시집와서 아들 다섯, 딸 둘 7남매를 낳았는데 막내 형용이가 7살 되던 해 놀러 나갔다가 오른쪽 눈에 화살이 박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네 중학생들이 겨울 방학에 집 앞에 있는 논바닥에 모여 화살 쏘기를 하는데 그것을 구경하려고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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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샘교회)
2016.04.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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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형편이 나아지자, 시어머니에게서 문제가 생겼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주술을 외우듯 입을 들썩거리며 생전 처음 본 사람도 늘 봐왔던 것처럼 지나온 과거사를 다 알고 얘기했다. 그래서 금방 ‘아무개는 귀신들려 점쟁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점을 치러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자 큰 방에 신당을 차려 그녀의 집이 아예 점집이 되어 버렸다. 시어머니가 섬기는 귀신은 선호동자였다. 선호동자를 부르면 세찬 바람과 함께 들어와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루는 어느 분이 돈 보따리를 잃고 찾아 왔다. 그 돈이 어느 산 어느 바위 밑에 있으니 가서 파보라고 점을 쳐 주었더니 부리나케 달려가 돈보따리를 찾았다고 한다. 이런 소문에 사람들이 더욱 북적댔고 정치인들도 상당수 드나들었다.순영 씨는 어느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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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샘교회)
2016.03.1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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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세 되던 해 5월 아들을 순산했다. 득남 소식이 동네로 퍼져나가자 사람들마다 이는 동네 경사라고 서로 즐거워했다. 아이를 못 낳으면 첩이라도 들일 것 같던 시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어 방긋방긋 웃는 아기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모든 근심과 괴로움이 다 사라지는 듯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명이 태어났을까?’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시아버지가 손자 이름을 형근이라고 지었다. 형근이는 온 집안에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러나 대를 이을 첫 손자를 본 시아버지는 이제 죽어도 좋다는 듯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상주 된 아들이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김순길 씨에게 붉은 징용영장이 나왔다. 당시 한반도를 식민지한 일제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하고 대륙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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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샘교회)
2016.03.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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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영은 충남 서천에서 이기행, 백언년 부부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1922년 7월 18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순영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 후 20여 년 동안 한반도에 생산되는 물자들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가는 식민지정책을 강화할 때여서 어머니 혼자서 5남매의 자녀들을 키우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자식들을 철저히 바르게 교육시켰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순영은 비록 가난하지만 조신하게 예의범절을 배우며 자랐다. 그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강경에 사는 세살 위인 김순길 청년과 중매로 결혼을 했다. 그땐 농촌 여자 16세가 결혼 적령기였다.결혼할 당시만 해도 강경은 평양, 대구 등 한국의 3대 시장의 하나로 유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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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샘교회)
2016.02.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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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원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17년 10월에 성서학원에서 식사문제로 학생소요가 일어났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물가는 높고 모금은 어려워 모든 면에서 절약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기숙사 식사도 부실해졌다. 이에 학생들은 불만을 품고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했다. 결국 토마스 원장은 무기휴학을 선언했다. 이것이 서울신학대학의 처음 발생한 학생데모였다. 1910년 일본의 강점 이래 여러가지 변화가 왔다. 일본은 한국통치의 구실로 근대화를 내세워 여러 가지 새로운 조치들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서울의 거리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시내에서 한강에 이르는 대로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 도로정비로 성서학원의 여자기숙사 일부를 헐어야 했다. 동양선교회는 이런 기회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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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6.02.0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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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원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17년 10월에 성서학원에서 식사문제로 학생소요가 일어났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물가는 높고 모금은 어려워 모든 면에서 절약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기숙사 식사도 부실해졌다. 이에 학생들은 불만을 품고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했다. 결국 토마스 원장은 무기휴학을 선언했다. 이것이 서울신학대학의 처음 발생한 학생데모였다. 1910년 일본의 강점 이래 여러가지 변화가 왔다. 일본은 한국통치의 구실로 근대화를 내세워 여러 가지 새로운 조치들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서울의 거리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시내에서 한강에 이르는 대로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 도로정비로 성서학원의 여자기숙사 일부를 헐어야 했다. 동양선교회는 이런 기회를 이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6.02.0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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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봉헌식이 1912년 9월 21일 토요일 오후에 이뤄졌다. 새로운 건물은 강당, 남자기숙사, 여자기숙사, 식당 그리고 선교사의 집으로 이뤄졌다. 강당의 이름은 이것을 짓는데 전액을 헌금한 사람의 죽은 아내를 기념하여 ‘리디아 홀’(Lydia Hall)로 정했다. 모든 시설은 스팀난방으로 되었으며 위생시설도 갖췄다. 성서학원의 봉헌 및 개원예배는 강당에서 토마스 교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한국주재의 여러 선교단체들이 대표를 보냈다. 일본에서 온 길보른의 봉헌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성서학원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학교는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학생선발은 이전까지는 지원하는 대로 받아들였으나 책임 있는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만 허가했다. 또한 입학 후 2개월 동안은 학생들의 소명을 확인하는 시험기간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6.01.2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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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카우만과 곧 서대문을 벗어나서 한 언덕에 올라갔다. 이 언덕에서는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으로는 산들이 이어져 있었다. 학교부지로서는 정말 공기가 쾌적하고 아름다운 장소였다. 서울장안이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이 오랜 세월 동안 빈터로 남아있었다는 것은 오로지 성서학원이 세워지는 날을 위해서라고 생각되었다. 이 언덕에는 감나무, 살구나무, 벚나무, 자두나무로 뒤덮여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과 과일이 열리는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온 도시를 다 뒤져봐도 학교터로 이 보다 알맞은 장소를 찾아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수세기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보였다. 땅값도 앞서 사기로 했던 것에 비해 반값도 채 안 되는 훨씬 싼 값이었다. 이렇게 좋은 학교대지를 사들인 것이 너무나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6.01.0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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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와 카우만은 성결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의 사역을 소개했다. 그리고 1910년 10월 11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일본으로 왔다. 약 1주일 동안 동양선교회의 일본사역을 돌아봤다. 그리고 1910년 11월 12일 토요일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날 13일 주일에 환영식을 했다. 토마스가 로마서 1장 8~12절을 봉독하고 세계가 한국인의 신앙을 주목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성령의 세례를 통한 모든 죄로부터의 현재적인 구원과 매일매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는 삶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토마스가 한국에서 해야 할 가장 급선무는 정상적인 성서학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서울의 전도관에서는 성경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김상준과 정빈이 약 25명의 학생을 모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5.12.3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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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선교회 간부들은 도쿄성서학원에서 유학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한국인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성결운동에 성공할 것을 확신했다. 1908년 도쿄성서학원에는 총명한 7명의 한국 남학생과 3명의 여학생이 공부하고 있었다. 이처럼 도쿄성서학원에서 많은 한국인 학생이 유학하자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일본에 올 필요 없이 한국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경제적으로, 현실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카우만 총리는 ‘전보(Electric Messages)’ 1910년 10월호에 ‘한국의 성경학교’라는 글을 게재하여 독자들과 회원들에게 특별한 후원을 호소했다. 한국은 아시아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므로 여기에 빨리 한국인에 의한 지도자 양성을 위해 성서학원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학원의 건물을 위하여 600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5.12.2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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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S 구호품 전달 순회목사류승규는 1956년 2월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에 충남 청양군 미당교회에 전도사로 청빙 받아 첫 목회를 시작했다. 신자도 몇 명 되지 않는 미자립교회여서 그는 적적한 시골목회가 맞지 않아 1년 만에 목포상락교회로 전임했다. 그러다 1년 만인 1958년에 광주로 올라가 신 개발지 주월동교회를 개척한 후, 1959년 5월에 목사안수를 받는다.그가 안수 받을 때의 일화다. 당시 교단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있었는데, 그는 동료 전도사 10여 명과 함께 총회 안수위원들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안수위원들은 원로급 목사들이어서 류승규는 김0호 원로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안수식을 마치고 류승규 햇병아리 목사는 선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늠름하게 퇴장했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5.12.1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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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시절, 아픈 친구의 장례식을 미리 거행전국에서 모여든 5~60명의 신학생들은 여건이 매우 불편한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은혜가 충만했고, 배움과 기도에 열심이었다. 대형 천막을 덮고, 안에는 판자로 길게 만든 식탁 겸 책상에서 강의를 듣고 강냉이 죽과 빵으로 식사 하고,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잤다.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남북 간의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전쟁이 끝났다. 정부는 그 해 8월 15일부로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으며, 서울에 있던 모든 기관과 학교 및 단체들도 차츰 서울로 속속 복귀했다. 서울신학교도 그 해 11월 말로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에 들어가면서, 1954년 3월 봄 학기를 아현동 서울신학교의 교사로 복귀했다.그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1954년 봄에 아현동 서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5.11.18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