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간 남편 대신 장사 나선 아내

그녀는 19세 되던 해 5월 아들을 순산했다. 득남 소식이 동네로 퍼져나가자 사람들마다 이는 동네 경사라고 서로 즐거워했다. 아이를 못 낳으면 첩이라도 들일 것 같던 시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어 방긋방긋 웃는 아기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모든 근심과 괴로움이 다 사라지는 듯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명이 태어났을까?’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시아버지가 손자 이름을 형근이라고 지었다. 형근이는 온 집안에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러나 대를 이을 첫 손자를 본 시아버지는 이제 죽어도 좋다는 듯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상주 된 아들이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김순길 씨에게 붉은 징용영장이 나왔다. 당시 한반도를 식민지한 일제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하고 대륙 일부를 점령하더니, 1941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면서 모자라는 군수물자와 군인 및 징용을 한인까지 강제로 했다.

그래서 한국의 청년들은 살아 돌아올 기약도 없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고, 군수물자를 위해 나이든 청년들은 징용으로 일본의 탄광으로 끌려갔다. 김순길 씨는 어머니와 처자를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일본으로 끌려갔으니 세 식구가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임시 가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고민을 하다 장사를 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삶의 현장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남편이 징용가기 전에 태기가 있더니 1944년 9월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둘째 형주가 태어났다. 하지만 남편 소식은 알 길이 없어 형주는 평생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인가? 생각하면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미군의 원자폭탄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일시에 두 도시가 폐허가 되고, 무려 30만명이 떼죽음을 당하자,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전의를 잃고 모든 야욕을 접고 미국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의 해방일이다. 이날에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 나와 “해방만세”를 부르며 태극기가 물결쳤고, 일본 사람들은 36년 만에 한국에서 일본 자기의 나라로 울며 쫓겨 가게 되었다.

그 해 9월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김순길 씨가 죽지 않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보고 싶어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여 “어머니!” 하고 감격에 벅찬 소리를 지르자, 방안에서 아들 음성에 놀란 어머니가 둘째 손자를 업은 채 밖으로 나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어머니, 아내는 어디 갔어요?” “응, 오늘도 네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장사하러 갔지.” “장사요?” 그는 자기 없는 동안 생계를 책임진 아내가 고생한 것을 알았다. 아내는 시집올 때 조신한 새 색시가 아니었다. 그가 없는 몇 년 동안 어머니를 보살피고 자녀들을 이끌며 강인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시작한 장사는 과자며 사탕 등을 팔다가 애쓴 보람으로 자리를 잡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강경역 바로 앞에 잡화상 점포를 내어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남편은 장사하는 아내를 도우며 날품으로 미장이 일을 하고 마차를 끌고 다니며 짐을 날라다 주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했다. 자기가 가장이어서 더 노력해야 한다며 새벽이면 뒷산의 땅을 개간하여 채소와 감자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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