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방전도대에 끌려 신앙생활 시작, 은혜 받고 개명

용주가 20살(1931년)이던 어느 여름날 판금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김천극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번화한 사거리에서 북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기에 호기심이 생겨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었다.

“여러분. 오늘 밤 경성(서울)에서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님이 오셔서 인생의 소중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모두 우리와 함께 교회로 가셔서 인생의 기쁨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외치자, 두 사람은 호기심으로 전도대를 따라 갔다. 그들이 간 곳이 김천성결교회(남산교회)였다.

이 집회에서 그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고 예수 믿겠다고 함께 손을 번쩍 들었고, 강사의 권면에 따라 이튿날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모든 예배를 빠짐없이 다녔다. 그들은 6개월만에 학습, 또 6개월 후 세례를 받고, 일 년 만에 총각집사로 임명되었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인기 있는 교사로 아이들에게 인정받았다.

그가 22살(1933년)되던 8월이었다. 총회에서 파견한 십자군 전도대 천막집회가 일주일 후 김천에서 열린다는 목사님의 광고가 있었다. 저녁 예배 후 그와 나이가 비슷한 청년들 7명이 모였다. 이번 집회에 은혜를 받기 위해 먼저 준비 기도를 하기 위해, 그들은 조그만 기도실에 들어가 찬송을 뜨겁게 부른 후 소리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벽 2시경 그들에게 큰 은혜가 임하여 회개가 터졌다. 황용주와 청년 7명이 회개하고 통곡하자 목사님이 나와서 그들에게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했다.  

이튿날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각자 노력했다. 황용주는 어머니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회개했고, 친구들을 만나 빌린 돈을 돌려주었다. 또 판금이와 함께 과수원 주인에게 찾아가 과거 과일 도둑질한 것을 말하고 값을 쳐주었고, 김천역장을 찾아가서 소년 때 무임승차 여섯 번 한 것을 회개하고 대금을 변상하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임했다.

일주일 후에 열린 부흥회에서 청년들은 큰 은혜를 받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어, 기도와 성경 읽기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이때 황용주는 그의 이름에 마귀를 상징하는 용(龍)자가 있음을 깨닫고, ‘용‘자를 거룩할 성(聖)자로 바꿨다. 그리고 판금이는 상범(尙範)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그는 황성주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은혜를 받은 청년 7명은 교회 일을 하기 위해서 모임을 만들어 ‘성우(聖友)청년회‘라고 명칭을 붙였다. ‘성결한 벗‘이기도 하고, ‘성결교회의 벗’이란 단순한 뜻이었다. 이 날이 1934년 1월 25일로 전국 성결교회 최초로 청년회가 조직된 역사적인 날이다. 이 모임은 성결교회 성청(聖靑)의 모체가 된다.

그들은 목사님의 허락을 받은 후 성우청년회 회칙대로 주일 예배 후 한 곳에 모여 뜨겁게 기도했다. 또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예배 1시간 전에 교회 근처 큰 길에서 노방전도하여 결심한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로 가서 새신자로 환영시켜 교회의 부흥에도 앞장섰다. 

이 성우청년회를 시작한 7명은 황성주, 여상범, 안계완, 이기창, 신태영, 이상윤, 조용수였다. 그들은 청년회의 방향을 다음 세 가지로 정하고 일했다. 첫째 기도운동, 둘째 봉사활동, 셋째 전도활동이었다. 이런 청년회의 활동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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