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악동(惡童) 생활

황성주는 1912년 7월 5일 충북 음성에서 출생했다. 당시는 5백년의 조선왕조가 일본의 침략에 의해 1910년 한일합병이란 미명으로 멸망 당한지 2년이 되는 때여서,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 설음과 울분을 마음속으로 삭이면서 지내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의 본명은 황용주(黃龍周)다. 부친이 항열인 용(龍)자를 따라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친동생은 황용석 장로였다. 그들은 7살 때 부친을 따라 경북 김천으로 이사하면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김천에서 보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가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모태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조선시대의 명재상 황희(黃喜) 정승의 후예라는 자부심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남편에게 더욱 공손해진 것을 알고 기독교 믿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면서 모친의 등에 업혀 교회를 다녔으며, 김천으로 이사하면서부터는 가까운 황금동장로교회의 주일(교회)학교를 다녔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원만해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동시에 공부도 잘해서 언제나 초등학교에서 우등생의 반열에 들었다. 또 5-6학년 때는 키도 남보다 크자, 선생님이 반장을 시켜 아이들을 통솔하는 지도력도 배웠다.

1926년 15살에 보통(초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가정의 형편상 고등보통학교(중학)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고, 김천과 같은 시골에서 중학과정을 공부하려면 대구나 먼 대전으로 유학을 가야했기 때문에 부잣집이 아니고서는 엄두를 못 냈다.

자기보다 공부를 못한 아이들이 부모를 잘 만나 대전이나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보자 그는 크게 낙심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데 별로 할 일이 없어 1년 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마침 두 살 아래 동생뻘 되는 친구인 판금이도 같은 처지여서 울분을 참으며 늘 함께 붙어 다니며 지냈다.

그러다 그들은 누가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함께 교회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말하는 탕자의 생활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면 ‘오늘은 무슨 짓을 할까?’ 하고 의논하면서 점점 방탕한 길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들은 함께 돌아다니다가 여름에 배가 고프면 마을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과일서리를 했다. 또 친구들에게 돈을 꿔서는 안 갚고 떼어 먹었다. 그들은 이런 짓에 어떤 스릴을 느꼈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또한 심심하고 답답한 날이면 여행을 가자면서 철조망을 뚫고 김천 역에 숨어들었다. 김천은 경부선의 중간 지점이어서 상행선이나 하행선을 가리지 않고 기차가 정차하면 재빨리 올라탔다. 차장이 나타나면 슬쩍 뒷 칸으로 갔다가 잠시 정차할 때 얼른 맨 앞 칸으로 올라타 대구나 대전까지 무임승차로 오르내리면서 별별 짓을 다하는 악동들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예능(藝能)에 소질이 있다. 용돈이 생기면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와 연극 보는 것을 매우 즐겼다. 그들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극장에서 나팔 부는 것이 멋있어 보여, 용돈을 모아 나팔을 사서 둘이서 열심히 연습을 하는 꿈의 소년들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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