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S 구호품 전달 순회목사

류승규는 1956년 2월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에 충남 청양군 미당교회에 전도사로 청빙 받아 첫 목회를 시작했다. 신자도 몇 명 되지 않는 미자립교회여서 그는 적적한 시골목회가 맞지 않아 1년 만에 목포상락교회로 전임했다. 그러다 1년 만인 1958년에 광주로 올라가 신 개발지 주월동교회를 개척한 후, 1959년 5월에 목사안수를 받는다.

그가 안수 받을 때의 일화다. 당시 교단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있었는데, 그는 동료 전도사 10여 명과 함께 총회 안수위원들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안수위원들은 원로급 목사들이어서 류승규는 김0호 원로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안수식을 마치고 류승규 햇병아리 목사는 선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늠름하게 퇴장했다. 그는 친지들의 축하를 받은 후, 볼 일이 위해 급히 화장실로 갔다. 그때 공교롭게도 그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신 김○호 원로목사와 함께 나란히 서서 소변을 봤다. 원로 목사님이 그를 보더니, 반갑다는 듯이 한마디 하셨다.

 “류승규, 오늘 목사안수 받은 소감이 어때?” 그러자 류승규 목사는 갑자기 장난 끼가 발동했다. “당신도 목사, 나도 목사. 이제 다 같은 목사인데 나한테 반말하지 말어!” 그 말에 원로목사의 얼굴에 노기가 솟아나 소리를 벼락 같이 질렀다. “이놈, 뭐가 어째?”

노목사님이 소변을 보시다 말고, 지팡이를 들고 그를 때리려고 높이 들었다. 그도 소변을 보다 말고 잽싸게 도망쳤다. 화가 나신 원로목사가 계속 지팡이를 들고 그를 찾아다녔지만 눈치 빠른 그가 그 원로목사를 보면 금방 피해버려 그들은 그 후 한번도 맞부딪친 일이 없었다.

류승규 목사는 그해 8월 성결교회가 없는 담양읍에 담양교회를 개척한다. 이처럼 그는 초기 목회생활 4년 동안 4교회를 전전하는 등 한 곳에서 1년 이상 시무하지 않았다. 그러니 교회가 부흥될 리 없다. 이는 아마도 그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활달한 성격 탓이리라.

마침내 그는 1960년에 동양선교회(OMS)가 관장하는 세계구호위원회 전남지역 순회목사로 임명된다. 이는 당시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의 경제생활을 돕기 위해 OMS 미국본부에서 미국성도들로부터 구호물품을 거두어 한국인에게 제공했다.

이런 물품들을 기차나 배로 전국 각 성결교회나 시설(고아원, 모자원 등)에 보내면 순회목사가 이를 전달하고 관리감독했기 때문에 그는 뛰어다니며 바쁘게 일했다. 이것이 그의 적성에 맞아 8년 동안 일했다.

그 후, 그는 전북 고향으로 가서 부용교회를 시무한 후, 광주로 와서 전남 도경국장을 찾아가 설득하여 도경 안에 경목실을 만들어 한 달에 한번씩 그가 경목실장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당시 경찰에서 아직 경목제도가 시행하지 않을 때여서 그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김신근 목사의 요청으로 광주숭의학원의 교목으로 발탁되어 1968년부터 1975년까지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 후 전북 남당교회, 함라신남교회, 그리고 김제 부용교회에서 목회하다 1992년에 부용소망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 받아 은퇴의 삶을 살다가 2004년 5월 24일 82세에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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