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결혼생활

이순영은 충남 서천에서 이기행, 백언년 부부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1922년 7월 18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순영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 후 20여 년 동안 한반도에 생산되는 물자들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가는 식민지정책을 강화할 때여서 어머니 혼자서 5남매의 자녀들을 키우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자식들을 철저히 바르게 교육시켰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순영은 비록 가난하지만 조신하게 예의범절을 배우며 자랐다. 그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강경에 사는 세살 위인 김순길 청년과 중매로 결혼을 했다. 그땐 농촌 여자 16세가 결혼 적령기였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강경은 평양, 대구 등 한국의 3대 시장의 하나로 유명했다. 강경은 금강하류의 관문으로써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하는 배들이 들어와 전국각지로 산매를 하는 교역이 활발하던 시장이었다.

신랑 김순길 청년은 훤칠한 키에 유머 감각이 뛰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청중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반도 땅으로 많이 건너와 사는 일본인들에게 관권과 상권을 빼앗겨 사는 한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아야 했기에 순길 청년의 집도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나자 시어머니의 눈치가 전과는 달라졌다. 아들이 5대 독자라 시집오자마자 떡 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 줄줄 알았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도 아들 하나만 겨우 낳아 가문의 대를 끊지 않고 이어 간 것만도 다행인데 새 며느리가 들어와 귀한 집의 대가 끊어질 것 같아 안절부절했다.

이렇게 시어머니의 손자 타령은 아이가 없는 며느리로선 가슴을 죄여 오는 고통이어서 그녀는 시어머니 굳은 얼굴만 봐도 심장이 떨리더니 결국에는 심장병까지 생겨났다. 그렇다고 친정에 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딸을 시집보낼 때 “별일이 있어도 너는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살아야만 했다.

당시는 조강지처가 딸을 많이 낳았다 해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소실을 두고 아들을 낳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예의바르고 당찬 성격이라도 5대 독자 집에서 기다리던 아이가 없으니 ‘시집 귀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집을 떠나야 하는가?’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사막에서 샘물을 만난 것처럼 뛸 듯이 기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밥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처럼 구역질이 나고, 또 신 것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여자가 애를 가지면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아! 나도 이제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때부터 점점 입덧이 심해졌다. 아이 못 낳는다고 구박하시는 시어머니 얼굴을 대할 때마다 괴로웠는데 이젠 그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될 성 싶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가 열 달까지 기다릴 것 없이 당장이라도 낳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걱정은 대를 잇기 위해 꼭 아들을 낳아야 할 터인데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시어머니의 무서운 얼굴이 마음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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