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31개 교회 개척

류재하 목사
송현교회는 80평 예배실로는 1부, 2부 예배를 소화 할 수 없어, 큰 교회당을 새로 건축해야 했다. 그래서 1974년 4월에 착공해 1975년 4월에 헌당식을 했다. 총면적 1987평이 되는 웅장한 교회로, 4000명의 성도가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황 목사는 정년을 3년 앞당겨 1979년 1월에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신자들이 만류했으나, 새시대는 새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고, 후임자를 선임한 후 그해 9월 28일에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음으로 목회경력 40년의 대단원을 일단 마쳤다.

그는 여생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미국 이민을 준비했고, 1979년 9월 30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미주에 도착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쉬지않고, 미주에서 할 일을 찾다가 미주에 있는 동포들의 구원을 위해 LA의 하시엔다교회와 다이아몬드바교회를 개척 설립하여 젊은 교역자들에게 인계해 미주성결교회 부흥에 한 몫을 했다.

그는 교역자로 헌신 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를 건축하여 영혼을 구원하는데 힘쓴 교회개척주의자였다. 그의 이런 목회관은 청년시절, 은혜 받고 청년들과 함께 스스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교회가 없는 마을을 찾아 복음을 전도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신자를 얻은 후 그 곳에 교회를 약하게 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립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목회지마다 교회가 없는 마을을 찾아 교회를 개척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라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반드시 기념하는 교회를 세워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그의 평소 목회신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앞장서서 실천했다.

그의 교회개척 역사는 청년시절, 김천교회 성우청년회 전도대를 통해 시작한 광천교회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소천하기 까지 무려 32교회나 된다. 광천교회는 선배이신 안창기 목사의 요청으로 고향인 광천마을에 전도를 부탁함으로 개척되었고, 그 후 김천 다수동에 다수동교회, 태촌마을에 전도대의 전도로 태촌교회가 개척되었다.

그 후, 부산 수정동교회 재임 시에는 6. 25 전쟁으로 피난민들로 가득할 때 개척교회를 세울 기회를 힘써 잡아, 영주동교회, 남천동교회, 범일동교회, 성림교회, 구덕령교회, 수정제일교회, 서면교회, 반여교회, 해운대교회 등 9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인천송현교회 재임 시에는 천광교회, 제청교회, 동산교회, 반석교회, 김포교회, 강화제일교회, 신안교회, 강화불온교회, 석남중앙교회, 강화성산교회, 강화선두리교회, 주안남부교회, 양문교회, 서울강남교회 등 14교회를 지교회로 개척했다.

또한 그는 그의 가족끼리 힘을 모아 개척을 장려했는데 점촌교회, 헤브론교회, 서울수정교회, 갈현교회 등 4교회가 이렇게 설립된 교회들이어서 그의 개척교회를 통한 교회부흥과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의 목회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끊임없는 교회개척은 그가 은퇴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어, 미주성결교회 부흥에도 한 몫을 담당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그의 평생의 꿈인 기도원을 경치가 좋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곁에 대지를 매입하여, 요세미티기도원을 창설하여 미주의 교회들에게 은혜의 기도처를 제공하여, 여생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다가, 1996년 11월 18일 하나님의 나라로 간 영적 거인이었다.  <끝>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