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아픈 친구의 장례식을 미리 거행

전국에서 모여든 5~60명의 신학생들은 여건이 매우 불편한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은혜가 충만했고, 배움과 기도에 열심이었다. 대형 천막을 덮고, 안에는 판자로 길게 만든 식탁 겸 책상에서 강의를 듣고 강냉이 죽과 빵으로 식사 하고,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잤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남북 간의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전쟁이 끝났다. 정부는 그 해 8월 15일부로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으며, 서울에 있던 모든 기관과 학교 및 단체들도 차츰 서울로 속속 복귀했다. 서울신학교도 그 해 11월 말로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에 들어가면서, 1954년 3월 봄 학기를 아현동 서울신학교의 교사로 복귀했다.

그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1954년 봄에 아현동 서울신학교 5층 교사로 가서 기숙사에 입사했다. 류승규가 재학 중 이런 일화가 있다. 1955년 6월 중순. 아현동 서울신학교 기숙사에서 동급생 양모 전도사가 갑자가 배가 아프다며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류승규가 동료들과 함께 치유기도하다 가만히 양 전도사의 맨살의 배를 만졌더니 얼음 같이 찼다. 그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전에 배가 찬 사람에게 오줌을 배위에다 여러 번 누면 배가 따뜻해서 고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 우리도 소변이 나오면 화장실에 가지 말고 양전도사 배 위에다 쉬 하자.”

그의 말에 동료들이 모두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자, 맨 먼저 류승규가 시범을 보였다. 그는 누워있는 양 전도사의 배를 벗긴 후, 대야를 밑에 받쳤다. 그리고 배 위에서 그가 소변을 누었다. 친구들도 그렇게 했다. 이런 일이 일주일 동안 계속 되었지만 별로 차도가 없었다.

마침내 금요일 아침이었다. 오전 학기 말 시험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여름방학의 시작이라 모든 신학생들이 임지를 향해 전국으로 떠나게 된다. 류승규가 동급생들에게 연락해서 양 전도사 방에 10여 명이 모였다. 류승규가 말했다. 

“오늘 오후면 친구들이 모두 전국으로 흩어지는데, 만약 방학 중에 죽으면 우리가 양 전도사의 장례식도 못 참석할 것 아닌가. 그러니 아예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양 전도사 장례식을 거행하면 어떤가?“ 그의 발칙한 제안에 동료들이 흠칫 놀랐고, 일부가 반대했다.

“그럼. 방학 중에 혹시 양 전도사가 죽으면 우리는 알지도 못해 장례식에 참석도 못하고 또 부조금도 못 낼 것이 아닌가? 이것이 친구의 의리란 말인가? 또 우리가 미리 장례식을 치룬다고 해서 이 사람이 죽는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만약을 위해서 하자는 말이지.”

그 말에 동료들이 모두 일리가 있다고 동의했다. 그래서 그는 동료에게 기도, 설교, 조사를 하도록 즉석에서 시킨 후 그가 사회를 진행했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이른 아침에 난데없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는 장송곡이 불려졌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는 부의금까지 거둔 봉투를 양 전도사의 손에 쥐어주고 모두 시간에 쫓겨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9월 초에 개학하고 보니 방학 중에 양 전도사가 고향에서 죽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급생들은 류승규가 양 전도사 죽음을 미리 아는 선경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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