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

이종무 목사
박형규(朴亨圭) 목사는 1901년 부여군 남면 대선마을에서 부친 박병욱(朴炳旭)과 모친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부친의 농사를 도우며 한학을 했다. 개화정신을 갖고 있던 그는 머리를 길게 늘이고 댕기를 땋고 다니다가 자진해서 머리를 잘라 조모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1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투옥되어 왜경의 심한 고문으로 업혀왔다. 그가 언제 기독교에 입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한국이 일본과 강제합방되어 국권을 상실했을 때 기독교가 방황하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세계관을 소개해 주는 복음이 되고 길잡이가 되었다.

1912년 부여규암교회가 설립되고 1914년 은산교회가 설립되어 규암교회나 은산교회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1만세 사건으로 질곡을 겪으면서 목회자로 소명을 받고 헌신을 다짐했을 것이다.

그는 1922년에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했다. 1924년 이명직 목사의 중매로 김은실과 결혼했다. 김은실은 경성성서학원 1년 후배로 성결교회창설자 김상준의 사촌동생 김석준 전도사의 딸이다. 김석준은 1913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부여 은산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그러나 1916년 규암교회로 부임하여 목회를 하던 가운데 위장병으로 몸이 허약하여 별세했다. 김석준 전도사는 그와 절친한 이명직 목사에게 유언을 남겨 딸 은실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시켰다.

김은실 사모는 박 목사의 목회에 좋은 내조자였다. 피아노반주를 잘하여 독립문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성가대반주를 했는데 당시 독립문교회 교인들의 찬송 음악 수준이 장안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김은실 사모는 경성성서학원 행사나 연합집회행사에서 반주를 도맡다시피 한 재원이었다.

박형규 전도사는 1923년 신학교 졸업 후 안성교회 부임전도사로 파송되어 시무하다가 주임전도사로 승차되었다. 이는 쉽지 않은 일로써 전임 한익찬 목사 별세 후 그가 열심히 일한 공적을 총회에서 인정한 듯하다. 1928년 안성교회 12명의 집사 중 남자가 8명이고 여자는 4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교회는 남자보다 여자의 숫자가 많고 따라서 집사도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것이 보통인데 안성교회만은 남자 집사가 더 많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박 목사는 일본인 전도자 오다 나리찌(織田楢次)와 생사고락을 같이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오다는 조선에서의 일본제국주의 죄악상에 충격을 받아 사죄하기 위해 조선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조선에 와서 조선인 전도에 전념했다. 그는 때때로 수원과 안성에서 전도하면서 박 목사와 교분을 맺었다. 박 목사는 오다 전도사의 진실함과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매우 훌륭한 전도자로 여겼고 오다 역시 박 목사를 존경했다.

오다 전도자는 성경을 조선말로 깊이 연구하고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 박 목사의 권유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오다는 졸업하자마자 서대문천연동성결교회의 주임전도사로 파송됐다. 오다 목사는 전영복(田永福)이라는 한국이름으로 개명하고 평생을 한국인교회에서 사역했다. 8·15해방 후에도 일본에서 한국인교회에서만 사역하면서 재일한국교회와 일본기독교와의 화해의 가교역할을 한 한국을 사랑한 목회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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