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분열 후 예성 총회장 재임 시 1차 합동의 주역

성도들의 기도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므로 아군이 북진을 계속하다 1953년 7월에 휴전되었다. 서울로 환도하자 부산은 차츰 안정이 되었고, 수정동교회는 영적 쇄신을 위해 새벽기도를 통해 은혜와 성결생활을 강조하여 은혜로운 교회로 알려졌다.

그러나 1958년 8월에 황 목사는 부산 수정동교회를 사임하고 인천 송현교회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새벽기도를 강조하고 신령한 은혜설교와 은사집회를 실시하여 교회에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자꾸 늘어나 부임 3년 만에 교인수가 배로 늘었다.

예전에 우리 교단은 교회연합체인 NCC와 NAE라는 두 기관에 가입되어 대표가 각각 파송되어 활동을 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58년 총회 때 러시아 정교회 대표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용공이며 자유주의라고 비난받았는데 한국 NCC가 WCC에 가입되어 있었다.

마침내 1961년 교단총회에서 NCC 탈퇴안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투표결과 NCC 탈퇴안이 불과 몇 표 차이로 보류되자, 소위 보수측의 대의원들이 대거 총회를 퇴장했다. 그들은 이듬해 4월에 총회를 따로 열고 예수교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총회를 조직했다. 이렇게 한국성결교회가 기성과 예성으로 분리될 때 황성주 목사는 예성 측에 속했다.

기성에서는 교단의 합동을 위해 1964년 총회에서 NCC와 NAE 동시 탈퇴안을 결의했다. 이때 예성의 이명직 목사가 합동을 위해 선언하자, 황성주 목사도 나섰다. 그것은 첫째, 분열의 명분이 없고, 둘째, 교회재산권 법적 투쟁이 비 신앙적이며, 셋째, 동료 목사들이 원수로 변한 것이 가슴 아프고, 넷째, 예성이 복음주의가 아닌 ICCC 즉, 극단칼빈주의연합회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1965년 4월의 예성총회에서 황성주 목사 측 합동파 인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자, 그는 임원들과 뜻을 합해 합동을 추진했다. 그래서 기성측 임원(총회장 이진우 목사)들과 수차례 만나 일부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동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적극 추진했다.

1965년 7월 29일 오후 2시에, 기성은 아현교회, 예성은 신촌교회에서 각각 임시총회를 소집한 후, 기성, 예성 각기 총회해체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7시에 아현교회에서 양측 대의원들이 모여 역사적인 합동총회를 선언한 후 서로 얼싸 안았다. 그리고 이듬해 1966년 총회에서 황성주 목사가 합동 총회장에 당선되어 교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총회장 임기가 끝난 후, 목회에 갈급한 심령으로 당시 유명한 기도원마다 찾아가서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다가 서울 삼각산 기도원에서 부흥회에 참석해 열심히 기도하던 중 성결의 은혜를 다시 체험했다. 이 체험이야 말로 웨슬레가 주장한 성화의 단계였다.

그는 성화의 단계를 체험하자 더욱 겸손해졌고, 예성에서 합동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미웠으나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용의 사람으로 변했다. 동시에 그는 목회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교회로 돌아와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안수기도를 했다. 그 결과 각종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문이 교회 안팎에 돌았다.

이 소문에 본 교회 신자 뿐 아니라 타 교회 신자들까지 새벽기도회에 나와 교회는 금방 만원이 되었다. 황성주 목사가 큰 은혜와 각종 은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자, 개 교회에서 각종 은사를 받고 이단으로 괄시 받던 신자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송현교회로 몰려들었다.

각종 은혜와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황 목사의 영적 지도를 받아 모두 봉사와 전도에 열심 있는 성도가 되어 교회부흥에 앞장을 섰다. 교회는 더욱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그가 부임한지 10년 만에 주일출석 1000명을 넘는 큰 성결교회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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