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성서학원의 창립

토마스와 카우만은 성결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의 사역을 소개했다. 그리고 1910년 10월 11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일본으로 왔다. 약 1주일 동안 동양선교회의 일본사역을 돌아봤다. 그리고 1910년 11월 12일 토요일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날 13일 주일에 환영식을 했다.

토마스가 로마서 1장 8~12절을 봉독하고 세계가 한국인의 신앙을 주목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성령의 세례를 통한 모든 죄로부터의 현재적인 구원과 매일매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는 삶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토마스가 한국에서 해야 할 가장 급선무는 정상적인 성서학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서울의 전도관에서는 성경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김상준과 정빈이 약 25명의 학생을 모아서 매일아침 성경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오후에는 전도활동에 나섰다. 이것은 동경성서학원의 일과와 같았다.

1909년에는 성경반의 학생수가 40~50명의 학생으로 빨리 늘고 있었다. 카우만은 한국에서 성경반이 크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대지와 교실, 강당, 남녀기숙사 등을 짓는 비용으로 6000달러를 계산하고 있었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신학교를 세우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10월호 ‘전보’에 의하면 한국선교는 선교사보다 토착민을 훈련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아직 한국에는 성결계통의 성서학원은 없고 기존교파가 토착사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일 년 내내 쉼 없이 성서학원을 운영하는 곳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 성서학원 설립의 당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이 세워지게 되면 일본의 도쿄성서학원보다 더 커지게 될 것이며 수용가능한 학생 수는 약 100명, 그 비용은 약 1만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1911년 3월 13일에 중앙복음전도관의 예배실을 임시교사로 하여 경성성서학원을 개원한 후 원장 토마스 목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육 시간 외에는 새 교사를 지을 교지 물색에 나섰다. 건축 준비가 된 카우만 총재는 기쁜 마음으로 경성에 왔다.

카우만 총재와 길보른 부총재는 성서학원이 개원된 지 2개월 만인 5월에,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성서학원을 통해 ‘성결의 은혜’가 크게 나타나게 하실 것으로 확신했다. 그들은 성서학원 건축을 빨리 매듭짓기 위해 대지물색을 서둘렀다.

끊임없는 기도 끝에 마침내 좋은 자리가 나왔다. 서울의 많은 언덕 가운데 단 하나 남아 있는 언덕으로 확신했다. 이 언덕을 성서학원의 교지로 사들이기로 하고 다음날 매매계약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동양선교회가 사들인다는 소문을 들은 다른 선교회에서 먼저 더 많은 값을 지불하고 그 장소를 사버렸다.

그 선교회는 감리교로 추측할 수 있다.(유동식 감리교회의 역사. p 205) 그러나 토마스와 서울의 전도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다시 대지를 찾아 나섰다.

때는 뜨거운 여름철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점잖은 한국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들이 학교를 세울 터를 찾는 분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가 말하기를 “저는 왕실의 집사입니다. 주인어른께서는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일부를 당신들에게 팔려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장소는 200년 동안 한 가문의 소유로서 놀랄만한 귀중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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