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해산, 광복과 교회재건, 그리고 6·25

황성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1940년에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서울 마포의 신수동교회 담임전도사로 일하다가 1943년 3월에 졸업했다. 그런데 그 해 5월 24일에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이 일본 국시에 어긋난다며 전국에 성결교회 교역자 구속령을 내려 황성주도 용산경찰서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다가 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9월에 성결교회 예배 중지령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어 할 수 없이 고향 근처 점촌에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휴양하면서 동생 황용석 집사와 함께 강변 모래땅을 매입해 신망애 농장을 세워 농사지으면서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고 일제의 멸망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해산령에 따라 1943년 12월 29일부로 해산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 200여 성결교회 신자들은 장로교나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겨 신앙생활을 했고, 교역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성결교회가 해산된 것도 그리스도 재림의 주장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났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두 차례의 미군 원자탄 투하로 일본의 두 도시가 황폐하게 되고 인구 30만이 몰사를 당하자 15일에 일본 왕이 항복을 선언하므로 한민족은 36년만에 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새로운 희망의 빛이 한반도를 덮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는 모 교회인 김천남산교회 담임교역자로 청빙 받아 팔려진 교회를 다시 찾아 1년 9개월 만에 재건하였다. 그해 11월 9일 교단 해산으로 흩어진 성결교회 교역자들이 서울신학교 강당에 모여 역사적인 재흥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그해 11월 21일 영남지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담임하던 김천교회가 점차 부흥일로에 있을 때, 그는 부산수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1947년 11월에 부임했다. 수정동교회는 당시 100여 명 모였는데 부산지역에서는 가장 큰 성결교회였다. 그러나 교회에 영적 활기가 없어 그는 부산에서 최초로 매일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여 영적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는 장로교회의 교세가 막강했는데, 모든 교회에서 주일에만 새벽기도회가 있을 뿐 평일에는 없었다.

황 목사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종을 쳐서 신자들을 깨워 기도회를 열고 심령의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영적으로 갈급한 성도들 뿐 아니라 장로교회 성도들까지 날마다 새벽기도회를 하는 수정동교회에 와서 은혜 받았다. 그후로 성결교회가 참 교회라는 인식이 생겨 장로교에서 교적을 옮겨오는 신자들도 생겼다. 그 대표적인 성도가 박이경 장로와 임용희 장로였다.

이런 소식이 장로교 목사들에게 알려지자 부산에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으면 좋은 신자를 성결교회로 빼앗긴다는 위기의식에서 교회마다 다투어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당시 황성주 목사가 부산에 영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한 몫을 감당한 것이다.

그 후 국가의 최대위기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어 전국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생존경쟁이 심했다. 그 여파로 교회는 전 보다 많이 부흥되었지만, 황성주 목사는 1000명이 넘는 대교회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성결교회 총회본부와 신학교도 부산에서 임시로 개교했을 때 물질적으로 수정동교회가 많이 도왔다. 피난 온 교역자들의 거처와 숙식마련에도 앞장을 섰다. 그는 전쟁 중 더욱 우리 국가의 생존과 아군의 승리를 위해 새벽이나 철야기도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울며 기도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