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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朴龍賢) 목사는 1941년 목안안수를 받은 후 40년 동안 올곧은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일관한 한국성결교회의 전형적인 진솔한 목회자였다. 박 목사는 오늘의 많은 목회자에게 목회자의 정체성과 좌표를 설정해 주고 있다.박용현 목사는 1908년 3월 20일 평북 의주군 고진면 석상동에서 박세식의 3형제 중 막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 한 권사는 일찍이 예수를 영접하여 사오십리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새벽밥을 지어놓고 예배당에 출석하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의 모친은 막내둥이 용현을 업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 산등성이에 기도처를 정하고 “이 아이를 주님께 드리오니 당신 뜻에 합당한대로 써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이 박용현이 목사가 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용현이 말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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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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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리 기도소가 부흥되고 집이 좁아서 예배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신자들이 교회를 새로 짓기로 하고 성의껏 헌금했다. 가난한 시골 성도들의 헌금은 90원이었다. 이 소식을 알고 총회에서 건축비로 500원을 보내 성도들이 힘을 합해 지금의 역리교회의 언덕땅을 구입, 10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넓은 교회를 건축하여 1928년 10월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헌당식과 동시에 역리기도소가 교회로 승격되었으며 총회에서는 윤순탄 전도사를 한인업 전도사를 돕는 교역자로 파송했다. 이렇게 되자 한 전도사는 윤 전도사, 신한나 집사 셋이 전도팀을 구성하여 인근 여섯 마을을 다니며 전도했다. 그들의 전도로 용동리에서 강현선 청년이 예수를 믿고 역리교회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신학교에 진학해서 성결교회 목사로 충성했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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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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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봄에 한춘경 전도인은 마을의 핍박 속에서 골 뜸 우물 옆집으로 집을 이사하고 그곳에서 계속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전에 보다 좀 한가한 곳이고 방도 커서 좋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핍박을 했다. 할 수 없이 한춘경 씨가 모 교회인 금당리교회에 가서 핍박받은 얘기를 하였고 그 교회 김달호 전도사가 총회에 연락, 총회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개척전도대를 파송했다.전도대원들은 목사와 전도사들로 구성되었는데 네 사람이 전도 차량에 큰 천막을 싣고 왔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이웃 마을 김달호 전도사였다. 마을에 큰 차가 나타나자 차를 처음 본 시골 아이들이 금방 몰려왔다. 전도대는 비교적 넓은 한나 씨 집 마당에 큰 천막을 친 후, 두 사람이 나팔을 불고 한사람은 큰 북을 둥둥 울리며 찬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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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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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인 한춘경 씨의 집 방안에서 주일마다 찬송소리가 나자 먼저 마을의 꼬마들이 하나 둘 몰려왔다. 꼬마들은 노랫소리가 나는 방의 창호지 창문을 손가락에 침을 묻혀 뚫어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정신을 헷갈리지 않기 위해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찬송하고 기도했다. 아이들이 들여다보니 방안에 여자와 남자들이 몇 사람 모여 앉아서 노래하고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었다.마을 개구쟁이들은 방안의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댔고, 또 어떤 아이는 창호지 창문을 주먹으로 쳐서 뻥 뚫어 놓고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라 생각하고 더욱 정신을 집중하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친 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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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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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나는 한춘경 전도인 가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전도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에만 마음을 쏟았고, 또 조상 때부터 믿는 유교를 버리고 서양종교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외면했다. 한나는 마을 사람들이 의외로 고집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자기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열심히 기도했다.“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어유? 나를 도와 주세유” 그녀가 기도 중에 문득 깨달음이 왔다. “그렇지. 전도는 말로만 해서는 안 돼. 사람에게 일을 잘 도와주면 고마워할 때 그 때 전도하면 잘 될 거야.” 그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깨달았다. 마을에 전부터 지체 높은 최 진사가 살았는데, 그 집 딸 최진숙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처녀였다. “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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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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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나는 1889년 1월 25일 충남 예산군 봉산 산골마을에서 신석영 씨의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심성이 고운 그녀는 연중 몇 차례나 돌아오는 제사상 차리기에 어머니를 도왔으며 음식솜씨를 익히고 배웠다. 또한 부덕을 위한 교양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바느질 솜씨를 익혀 좋은 규수로 소문이 사방으로 났다.17세 혼기가 되자 홍성에서 중매쟁이 아줌마가 찾아왔다. 이웃 홍성에 사는 20세 청년 전 씨가 훌륭한 신랑감이라는 극구칭찬에 넘어가 부모는 서둘러 결혼을 시켰고 그녀는 홍성에 가 시집살이를 했다. 그렇지만 시댁은 변변한 농사도 별로 없이 남의 집 농사에 불려 다니며 일해주고 근근히 생활하는 형편이어서 신혼의 단꿈도 별로였다.1910년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일본에 병합이 되자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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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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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경은 충남지역에서 선교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강경은 가장 유명한 포구 중 하나로 인구가 1만 여명이나 되는 상업중심지였다. 동양선교회는 물류의 중심지 강경에 전도관을 개척하기로 하고 1918년 가을 정달성을 파송하여 조선집 두 칸을 얻어 그해 12월부터 교회를 시작했다. 최초에 출석한 사람은 여학생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배장소가 초라해 전도하면 “여보시오. 염치도 없이 그런 곳으로 누구더러 오라하시오”라고 핀잔을 들어야 했다. 동양선교회는 새로운 장로를 물색하려고 했다. 동양선교회는 3·1운동 직후 사태가 어려웠지만 토마스 감독이 이장하를 대동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러 강경에 갔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로 오해를 받아 일본경찰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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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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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시련 가운데에도 확장되었다. 규암교회에서 10리 떨어진 은산(恩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장터로서 장날이면 약 5~8천명이 모였다. 교통의 중심지인 이곳에 규암전도관의 사역자들은 장날이면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이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의 결실로 은산에서 규암전도관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은산전도관이 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1914년 5월 29일 토마스는 이장하와 함께 은산전도관의 개설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규암에 내려왔다. 그 다음날 그들은 은산에 가서 전도지를 배포하면서 지형을 유심히 살폈고 은산 주위에 교회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양선교회는 은산이 ‘은혜의 동산(Mountain of Blessing)’이라는 복음적인 지명으로서 여기에 전도관을 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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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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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성결교회 이사회는 용정에 성결교회 개척 여건을 살펴볼 시찰원으로 본부 이사인 최석모 목사를 파송했다. 1924년 7월 15일에 용정에 도착한 최 목사는 도착 다음날부터 3일 동안 특별집회를 인도하며 개척의 불을 붙였다. 본부는 1925년 3월 이원근 전도사를 용정교회 주임교역자로 파송하였다.이로써 조선성결교회는 창립이후 처음으로 해외선교를 시작했고 이 전도사는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이원근 전도사는 1925년 3월 28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3월 30일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 용정성결교회로 부임했다.박기래 집사는 그 후 귀국하여 청주에서 시계포를 경영하면서 청주서문성결교회에서 열심히 주를 섬기며 김종호를 교회로 인도했다. 김종호는 신실한 주님의 일꾼으로 청주서문교회의 장로로, 한국도자기 창업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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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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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교회의 성장과 주일학교 운동규암교회 신자들은 보다 적절한 예배장소를 마련하고자 헌금을 했다. 매우 가난한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위해 현금과 쌀, 반지를 드렸고 어떤 신자는 10분의 7을 드리는 등 성도들은 힘에 넘치도록 헌금했다. 이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동양선교회는 이런 사실들을 널리 알리면서 후원자들의 헌금을 요청하기도 했다.복음전도관에는 남녀성인과 함께 어린이들도 많이 모였는데 나팔 불고 북치고 전도하는 전도대에 어린이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1914년 규암전도관에는 주일학교 어린이가 249명이나 되었다. 박제원 전도사는 특별히 어린이를 사랑했고 어린이를 주께 인도하는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다. 빈궁한 농촌에서 주일학교운동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는 장년들의 신앙 못지않게 어린이들에 대한 신앙교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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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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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성결교회는 부여의 규암(옛 바위)전도관이다. 따라서 규암교회는 충남지역의 모교회이다. 규암전도관은 박제원과 김성기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김성기는 1910년 서울에서 예수를 믿고 1911년 묘동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12년 7월 경 고향인 부여 규암 석촌으로 낙향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박제원은 경성성서학원 학생으로서 당시 학칙에 따라 여름방학 중에 부여 규암으로 내려가 김성기 집에 머물면서 전도를 했다. 박제원은 김성기의 집에서 1912년 7월 26일 토요일에 기도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최초의 집회이다. 그 후 주일예배와 수요기도회를 드렸다. 출석인은 10명 이내였고 박제원은 마태복음을 강해했다.박제원은 1884년에 충북 청원군 사주면 분평리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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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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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지점장이 되자 우선 성결교회를 찾아 돈암동성결교회에 등록했으며 교회 근처에 집을 장만했다. 그러나 1943년에 성결교회가 해산되자 신앙생활을 위해 근처 감리교회에 나갔다. 그는 일제말기 전쟁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사업을 버텨나갔다. 마침내 1945년 8.15 해방이 왔다. 그는 직장에서 민족차별을 받은 경험 때문에 독립국가가 된다는 기쁨에 감격스런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떠나면서 일본인 회사들도 문을 닫았고 그의 회사도 폐쇄됐다. 해방 직후 사회는 시끄럽고 무질서했다. 그는 정세를 당분간 관망하면서 창업 준비를 하다가 1946년에 ‘대한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업했다. 한국 최초의 보험회사였다. 그는 직원들을 신자들로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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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편집위원장)
2009.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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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사원이 된 그 때부터 임창호는 실적을 쌓기 위해 동료들과 선의의 경쟁을 해야 했다. 당시 보험의 주 고객은 대개 일본 사람들이어서 그는 일본인 동료들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남보다 더 노력했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를 열심히 했다.그가 어느 날 동료 일본인 사원과 크게 다투었다. 일본인사원이 계약을 성사 못 시켜 고객이 가려고 하자 그가 고객을 만나 정성을 다해 보험의 유익에 대해 말을 했다. 인물도 좋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자 일본인 고객이 계약서를 썼다. 이 때 갑자기 아까 그 일본인 동료가 나타나 조선인 주제에 일본인을 넘보지 말라며 계약서를 빼앗았다. 그 말에 다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가 때리려다 그만 민족감정에 설움이 북 받쳐 밖으로 나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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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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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가 17살 때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곽재근 목사가 걱정이 되어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냐?”,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성공할 수가 있다.” 곽 목사는 아브라함의 믿음 3가지를 제시했다. “하나,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서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린 것처럼 가는 곳마다 교회를 찾아 주일성수를 하라. 둘, 물질이 많은 소돔성보다 헤브론 벌판을 선택한 것처럼 물질의 종이 되면 안 된다. 셋, 독자 이삭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독자라도 드리는 마음으로 봉사하라.” 이 말씀이 창호의 일생의 좌우명과 지침이 되었다.창호는 서울보다 남쪽 전라도 쪽을 선택했다. 서울이 마치 소돔성처럼 복잡한 도시로 생각되었고 전라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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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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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집의 넓은 마루를 치우고 그곳에 마을 어린이들이 모였다. 집주인 여메례 전도사는 얼굴이 예쁘고 목소리가 고와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는 여 전도사를 통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얘기하실 때마다 눈에 눈물이 글썽하시는 여전도사의 모습을 임창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또 그녀는 꾀꼬리 같이 맑고 고운 음성으로 찬송가를 잘 가르쳐 주었다. 그 때 배운 찬송 중에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찬송을 그는 가장 좋아했고, 평생토록 어려울 때마다 즐겨 부르고 힘을 얻는 찬송이 되었다.어느 날, 교회에 이웃마을의 장로교회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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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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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는 1905년 3월 13일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즈음의 상황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힘든 시기였다. 1894년 동학란(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온 일본군은 계속 주둔하면서 조선의 정치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조선의 보호국으로 자처한 청국과 서로 반목질시하다가 1897년 청일전쟁이 일으켰고 청국이 패하게 된다.조선의 고종 임금은 1897년 국가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로 취임한다.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외교를 강화하였고 일본은 이에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하는 등 승리한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을 포섭하여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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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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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은 후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문 전도사와 백 전도사 그리고 몇몇 교인들을 연행해갔다. 죄명은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공산당들은 양민들을 잡아다 가둬놓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유로 잔인한 매질 끝에 밤마다 두 세 사람씩 끌어내어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문 전도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풀어주었다. 얼마 후 국군이 목포에 상륙했다는 말이 돌았고 이를 전해들은 공산세력은 후퇴를 서둘렀고 10월 4일 국군의 배가 증도로 다가오는 그날 밤 양민들과 교인 수십 명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줄줄이 엮어 끌고 갔다. 문 전도사와 백 전도사도 이 대열에 있었다. 악도들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마구 내리치니 한 사람 두 사람씩 쓰러져 죽었다.10월 5일 새벽, 백 전도사도 손을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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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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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은 6년의 학업을 마치고 영예로운 졸업장을 가슴에 안고 신안군 증도로 돌아왔다. 증동리교회를 선교본부로 삼아 머물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안 일대의 섬들을 돌며 말씀을 전했다. 증동리를 비롯하여 대초리 방축리 염산 등에도 교회와 기도소를 세우고 임자, 재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영혼을 사랑하고 불우이웃을 돕는데 그 누구보다도 앞장선 그녀는 섬마을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신안군 10여개의 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마을에 매우 요긴한 사람이 됐다.그는 어디든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그 당시 교통이 매우 열악한 때라 수많은 섬들을 찾아다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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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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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성서학원 청강생이 된 것만으로 문준경은 감지덕지했다. 그 당시 경성성서학원 학제는 6년으로 매년 3개월 동안 공부하고 9개월 동안은 어디든지 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해야 했다. 그는 학기 중에는 청강생으로 뒷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면서 정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장학금지원을 받지 못해 배고픈 설움도 많이 겪었다.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9개월의 실습기간이 돌아왔다. 그녀는 첫 실습을 신안군 임지면 진리에 와서 전도하여 진리교회를 세웠다. 그녀는 첫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증도에서 가까운 임자를 택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임자도에 발을 내딛었다. 문준경은 임자도에 당도한 후 노방전도를 시작하였으며 쉬는 동안 동네 언덕에 올라 찬송가를 불렀고 이 찬송을 듣는 아이들과 동네아낙, 할머니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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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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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소명감으로 전도자가 되어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시어머니는 큰 시숙이 모시게 되어 홀로 남게 된 문준경은 결혼 후 20년 동안 살아온 등선마을을 떠나 목포의 큰 오라버니 댁 근처로 옮겼다. 목포 북교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프고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의 나이 37세, 1927년 3월 5일 여느 때와 같이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좀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자신과 똑같은 또래의 점잖은 부인이 가만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가 처음 보는 성경과 찬송가를 꺼낸다.“자매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뜨거운 지옥 불구덩이에 빠집니다. 자매님, 사는 게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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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05.0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