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교회 설립과 신사참배 거부

당시 강경은 충남지역에서 선교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강경은 가장 유명한 포구 중 하나로 인구가 1만 여명이나 되는 상업중심지였다. 동양선교회는 물류의 중심지 강경에 전도관을 개척하기로 하고 1918년 가을 정달성을 파송하여 조선집 두 칸을 얻어 그해 12월부터 교회를 시작했다. 최초에 출석한 사람은 여학생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배장소가 초라해 전도하면 “여보시오. 염치도 없이 그런 곳으로 누구더러 오라하시오”라고 핀잔을 들어야 했다.

동양선교회는 새로운 장로를 물색하려고 했다. 동양선교회는 3·1운동 직후 사태가 어려웠지만 토마스 감독이 이장하를 대동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러 강경에 갔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로 오해를 받아 일본경찰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오랫동안 영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총독부 사이에 협상을 벌여 일본은 토마스에게 배상하고 토마스가 귀국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토마스는 그 피해보상금 가운데 일부를 건축헌금으로 내어놓았고 강경교회는 1923년 새로운 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장하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해 식민지지배 상황에서 민족의 비운의 상처까지 덧입었다.

1924년 10월 11일 강경은 신사참배 문제로 시끄러웠다. 강경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이 신사참배 동원에 반발한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신사에 참배했으나 교사 김복희와 그가 인솔하는 57명의 학생들은 신사참배에 불참했다. 김복희는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였고 학생들도 대부분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헛된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지한 미신이며 하나님 앞에 죄 됨을 깨닫고 신사에 절하지 아니했다.

당국은 신사참배에 불참한 교사와 학생들을 하나씩 취조하며 잘못되었다고 항복하지 아니한 교사는 면직시키고 학생들은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 문제로 조선총독부학무국장이 직접 내려와 충남학무당국과 교장이 협의하고 교사 면직이나 학생들의 퇴학을 시도했으나 퇴학시킬 조건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은 학부모회의를 열었으나 학부모들 역시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교회를 통해 변화된 학생들을 칭찬하며 감싸줬다.

교장은 김복희를 권고사직 시키고자 했으나 김복희 선생은 “내가 면직은 당할지언정 권고사직은 아니하겠노라”고 자신의 굳은 의지를 밝히고 결국 면직을 당하게 되었다. 강경교회의 이 사건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3·1운동가로 오인 받아 왜경에게 구타당하고 받은 보상금으로 강경교회가 지어졌고 그 뒤를 이어 사역한 이가 백신영 여전도사였다.

그는 원래 YWCA의 교사 겸 종교부장 대한적십자사 봉사부장 등을 통해 암울한 일제치하시대에 여성에게 신앙과 소망을 주고 문화적으로 일깨워준 선각자였고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9월 김마리아가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사부장(행동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1920년부터 1927년까지 강경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백신영은 특별히 강경교회주일학교를 부흥시켰는데 강경에서의 신사참배 거부는 이런 배경 아래서 일어났던 것이다.

서울 이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규암교회를 비롯하여 부여 은산 홍산 강경을 축으로 하여 56개의 성결교회가 포진하여 성결복음을 확장시켜가고 있으며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부여지역에서 배출된 성결교회 교역자만도 100여명을 상회하고 있으며 총회장, 부총회장, 서울신학대학교총장, 교단총무, 우수한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등 교계의 많은 인재들이 나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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