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성결교회 부여 규암전도관

서울 이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성결교회는 부여의 규암(옛 바위)전도관이다. 따라서 규암교회는 충남지역의 모교회이다. 규암전도관은 박제원과 김성기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김성기는 1910년 서울에서 예수를 믿고 1911년 묘동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12년 7월 경 고향인 부여 규암 석촌으로 낙향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박제원은 경성성서학원 학생으로서 당시 학칙에 따라 여름방학 중에 부여 규암으로 내려가 김성기 집에 머물면서 전도를 했다. 박제원은 김성기의 집에서 1912년 7월 26일 토요일에 기도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최초의 집회이다. 그 후 주일예배와 수요기도회를 드렸다. 출석인은 10명 이내였고 박제원은 마태복음을 강해했다.

박제원은 1884년에 충북 청원군 사주면 분평리에서 태어났다.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서울로 올라와 의지할 곳이 없어서 1905년 연동장로교회에 입교하여 이듬해에 세례를 받고 곧 집사의 직분을 받았다. 그는 민족의 장래가 오직 주께 있음을 확신하고 성경연구와 진리 탐구에 정진했다.

1908년 김상준 전도사의 노방전도 설교에 이끌려 전도관 집회에 참석한 그는 성경강의와 체험적인 간증에 회개하고 거듭나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했다. 1910년 같은 은혜를 받은 이명헌과 함께 성결교회로 전적했다. 이듬해 성서학원이 설립되자 첫 학생으로 입학하여 1913년 제2회 졸업생이 되었고 그 해에 규암교회를 창립했다.

김성기의 요청에 따라 토마스 부부와 이장하, 최홍은이 1912년 10월 8일에 전도관을 세울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기차로 강경에 도착하여 금강을 따라서 배를 타고 규암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전도관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발견했다. 그것은 규암전도관을 세우겠다는 김성기가 첩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동양선교회는 김성기가 첩을 두고 사는 한 세례를 줄 수 없으며 그를 중심으로 전도관을 세울 수 없다는 방침을 내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첩을 내보내야 하며 그렇게 할 때까지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김성기와 첩은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면서 박제원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겠다고 암시했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먼저 김성기의 집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며 그런 후에야 박제원을 보내겠다고 했다. 얼마 후에 김성기가 동양선교회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규암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해 여름에 박제원은 다시 규암에 내려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성과를 얻고 8월에 상경했다.

규암의 신자들은 동양선교회에 빨리 교역자를 파송하여 달라고 요청했더니 1913년 10월 13일 길보른, 김상준, 이장하와 박제원이 다시 규암에 내려갔다. 동양선교회는 이곳에 전도관을 설립하기로 작정하고 김상준과 박제원을 정주시켰다. 동양선교회는 김성기가 첩을 버리지 아니하므로 그의 집에서 전도관을 시작할 수 없어서 점검리 3번지 1호 박기래의 집으로 정했다.

신자들은 손수 이 집을 약간 개조하여 전도관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동양선교회가 대지를 사준다면 그들은 건축자재를 제공했다고 했다. 이때부터 박기래는 규암전도관의 주역이 되었다. 김성기의 문제는 규암전도관의 큰 시련이었지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더욱 분명하게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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