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결혼, 신앙생활

신한나는 1889년 1월 25일 충남 예산군 봉산 산골마을에서 신석영 씨의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심성이 고운 그녀는 연중 몇 차례나 돌아오는 제사상 차리기에 어머니를 도왔으며 음식솜씨를 익히고 배웠다. 또한 부덕을 위한 교양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바느질 솜씨를 익혀 좋은 규수로 소문이 사방으로 났다.

17세 혼기가 되자 홍성에서 중매쟁이 아줌마가 찾아왔다. 이웃 홍성에 사는 20세 청년 전 씨가 훌륭한 신랑감이라는 극구칭찬에 넘어가 부모는 서둘러 결혼을 시켰고 그녀는 홍성에 가 시집살이를 했다. 그렇지만 시댁은 변변한 농사도 별로 없이 남의 집 농사에 불려 다니며 일해주고 근근히 생활하는 형편이어서 신혼의 단꿈도 별로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일본에 병합이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남편이 갑자기 집을 떠났다. 이유는 큰 도시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는 것이었다. 시댁의 부모들도 만류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 둘과 함께 시부모를 섬기며 혼자 살아가야 하는 그녀는 답답할 때마다 새벽에 일어나 정한수를 떠 놓고 하늘에 빌었다.

예산에 출가하여 사는 시고모가 오랜만에 친정에 왔다. 출가한지 10년 만에 처음 온 것이다.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 없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시고모는 안쓰러운지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했다. 그리고 자기 집 근처로 와서 농사를 도와주면서 살 수 있게 해준다며 시부모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래서 살기 위해 그녀는 시고모를 따라 아이들과 함께 예산의 좌방리로 이사했다.

그녀는 시고모의 주선으로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살면서 날마다 시고모댁 농사일을 거들었다. 시고모 댁은 3천석지기 큰 농사를 하는 집안이어서 머슴도 많고 일을 거드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일을 하며 받는 삯으로 아이들과 먹고 살았고 때로는 삯바느질을 해서 부지런히 했다.

시고모는 예수 믿는 신자였다. 주일에 처음으로 시고모를 따라 좌방리감리교회에 가서 등록했다. 그녀는 전도사의 기도와 설교에 놀랐다. 막연히 하늘에 어떤 신령한 분이 계시겠지 여겼는데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이 되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갑자기 앞길이 환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

“옳지.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다.” 그녀는 굳게 결심하고 그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겉으로는 순하고 아름다웠지만 한번 마음을 먹은 것은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일년 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죄도 회개하여 기쁨을 얻었다.

마침 그 때 홍성출신 한춘경 씨가 박물장사로 여러 곳을 다니다 전도를 받아 고향 금당리로 돌아와 금당성결교회에 다니며 은혜를 받았다. 그는 문득 예산 역리마을이 넓고 살기 좋은 것을 알고, 역리마을에 와서 초가 한 채를 사서 약혼자와 장모와 함께 살면서 가정예배를 드리다가 주일이면 금당리교회에 가서 예배드렸다.
1924년 새해가 되자 그는 역리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가족이 열심히 마을 사람들을 찾아 전도했다. 이 때 주일에 먼 좌당리교회에 다니던 신한나와 길에서 만났다. 신한나는 역리마을에 교회가 생긴다는 말에 기왕이면 가까운 교회에 갈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에 기쁘게 역리개척기도소에 합류했다. 이렇게 그녀는 역리교회 최초의 개척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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