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암교회의 성장과 주일학교 운동
규암교회 신자들은 보다 적절한 예배장소를 마련하고자 헌금을 했다. 매우 가난한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위해 현금과 쌀, 반지를 드렸고 어떤 신자는 10분의 7을 드리는 등 성도들은 힘에 넘치도록 헌금했다. 이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동양선교회는 이런 사실들을 널리 알리면서 후원자들의 헌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복음전도관에는 남녀성인과 함께 어린이들도 많이 모였는데 나팔 불고 북치고 전도하는 전도대에 어린이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1914년 규암전도관에는 주일학교 어린이가 249명이나 되었다. 박제원 전도사는 특별히 어린이를 사랑했고 어린이를 주께 인도하는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다. 빈궁한 농촌에서 주일학교운동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는 장년들의 신앙 못지않게 어린이들에 대한 신앙교육도 중요하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인식시켜가며 주일학교운동을 이끌었다. 1914년 7월에 박 전도사는 규암전도관을 떠났으나 한 번 자리 잡은 유년주일학교는 해마다 발전했고 1915년에는 주일학생이 380명, 1918년 703명, 1920년 627명, 1921년 928명으로 성장했다.

유년주일학교운동을 선도한 규암전도관을 본받아 지교회로 설립한 은산, 홍산 전도관도 주일학교운동이 보급되어 합동으로 성탄축하예배도 드리는 등 활성화 되었다. 1917년 6월에는 본부의 파송을 받은 강태즙 전도사가 소아공부회(어린이부흥회)를 저녁마다 열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통회 자복하여 큰 은혜를 받고 주께 영광 돌렸다. 1914년 박제원 전도사는 김천으로 전임되어 그곳에서 김천복음전도관을 개척하고 1915년 6월에 경주로 파송되어 8월 1일 경주복음전도관을 개척했다. 그는 김천에서도 경주에서도 주일학교운동을 벌였다.

1917년 11월 8일 경성신학교를 졸업한 김성업 전도부인이 규암에 부임했다. 당시 부여지역이 워낙 궁벽한 농촌인지라 교인들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사정을 안 김성업 전도부인은 김석준 주임전도사와 김창희 부임전도사의 후원을 얻어 교회부설기관으로 간이학교를 개설했다. 이 간이학교는 남자 아이들에 비해 더욱 천시당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여자 아이들을 위하여 개설했다.

이 간이학교는 1918년 12월에 개교했고 매일 부속학과를 가르쳤다. 부속학과는 그때에 많이 유행하는 사립학교의 교과과목으로 보인다. 이 시절의 여자아이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탄한 김성업 전도부인의 헌신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1919년 2월에 김성업 전도부인이 결혼하고 서울로 올라감으로 규암간이학교도 1년 6개월 만에 폐교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규암교회의 주역인 박기래는 나중에 만주 용정교회 개척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1919년 2월 가족과 함께 만주의 용정으로 이민했다. 박 집사는 당시 빈궁한 경제 상황과 함께 일제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주를 섬기며 자녀들에게 자유로운 교육도 시키려고 용정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당시 용정에는 한국동포 30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장로교회가 2, 감리교회가 1, 침례교회가 1개 있었다. 박 집사는 어느 교회를 가나 고향에서 받았던 성결의 은혜를 맛볼 수 없었다. 고향교회에서 가졌던 뜨거운 믿음과 성결의 은혜가 식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용정장로교회에서 박정환이란 믿음의 형제를 만났다. 그는 경주성결교회에서 열심히 주를 섬기던 성도였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체험한 성결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던 터라 용정에 성결교회를 세우기로 약속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박 집사는 또한 용정에서 시계포를 경영하는 한치국 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장로교의 뿌리를 가진 신자로서 조선성결교회본부가 발간하는 신앙잡지 ‘활천’을 애독하기 때문에 성결교회에 대해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치국 집사는 박기래 집사와 박정환 성도의 제안을 받아들여 1923년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 이 곳에서 30여명이 모여 기도회를 시작했다. 1923년 12월 25일 9원의 돈을 모아가지고 뜻있는 성탄축하예배를 드리고는 곧 조선성결교회본부에 교역자를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