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과 목회의 소명

박용현(朴龍賢) 목사는 1941년 목안안수를 받은 후 40년 동안 올곧은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일관한 한국성결교회의 전형적인 진솔한 목회자였다. 박 목사는 오늘의 많은 목회자에게 목회자의 정체성과 좌표를 설정해 주고 있다.

박용현 목사는 1908년 3월 20일 평북 의주군 고진면 석상동에서 박세식의 3형제 중 막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 한 권사는 일찍이 예수를 영접하여 사오십리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새벽밥을 지어놓고 예배당에 출석하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의 모친은 막내둥이 용현을 업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 산등성이에 기도처를 정하고 “이 아이를 주님께 드리오니 당신 뜻에 합당한대로 써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이 박용현이 목사가 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용현이 말을 알아들을 즈음 어머니의 말을 들은 용현은 어머니가 자기를 남에게 주겠다는 줄 알고 교회에 따라가지 않으려고 숨은 적도 있었다.

용현은 어릴 때부터 건장했다. 소학생 시절 사촌형과 육촌형 그리고 상급생들과 어울려 뒹굴며 노는 등 장난이 심해 크면 일 낼 개구쟁이로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났었다. 청소년기에는 씨름꾼으로 의주군 내에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는 장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도 한 때 방탕하여 지내기도 했다.

1932년 24세에 백복련과 결혼한 후 그는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자전거포를 열었다. 신의주는 당시 금은밀수가 성행하여 얼마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점차 밀수단속이 심해지면서 도산하는 곳이 많았다. 그가 운영하는 자전거포도 처음에는 잘 되는 듯 했으나 나중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의주성결교회 부흥성회에서 회개하고 신앙이 불붙어 교회 종치기, 장작 패기 등 궂은일을 도맡았고, 찬송 인도자, 주일학교 교사, 청년 집사 등 교회 봉사에도 열심을 다했다.

그는 취직시험에 합격하여 만주 무순 지방의 탄광기사로 근무하면서 박영애 전도부인이 개척하는 무순성결교회에서 교회 종치기, 청소, 노방전도 등 열심히 봉사했다. 박 전도부인이 다른 지역으로 전출하자 무순교회 유급전도자로 임명되어 직장을 사직하고 목양사역에 전념했다.

박영애 전도부인, 신의주교회 한성과 목사, 이명직 목사에게 목사가 되라는 권면을 받고 신학 진학을 결심하고 신의주에 있는 장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처자가 있는 가장이 이제 공부한다니 말이 안 된다’, ‘처자는 네 책임이니 도와줄 수가 없다’고 거절을 들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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