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아홉 켤레와 죽음의 각오

문준경은 6년의 학업을 마치고 영예로운 졸업장을 가슴에 안고 신안군 증도로 돌아왔다. 증동리교회를 선교본부로 삼아 머물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안 일대의 섬들을 돌며 말씀을 전했다. 증동리를 비롯하여 대초리 방축리 염산 등에도 교회와 기도소를 세우고 임자, 재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영혼을 사랑하고 불우이웃을 돕는데 그 누구보다도 앞장선 그녀는 섬마을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신안군 10여개의 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마을에 매우 요긴한 사람이 됐다.

그는 어디든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그 당시 교통이 매우 열악한 때라 수많은 섬들을 찾아다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는 김에 주민들의 부탁으로 심부름꾼, 짐꾼, 우체부 노릇을 하기가 일쑤였으니 고된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언제나 그의 손에는 선물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잔칫집에 초청받으면 잔치음식을 싸달라고 하여 배고픈 섬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보따리에 때로는 과일, 감자, 고구마, 학용품, 장난감, 의복, 아낙네에게 필요한 잡화 등이 들어있어 그가 도착하면 보따리에 시선이 가 있기도 했다. 그는 섬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추위와 더위, 비바람, 눈보라를 가리지 않고 갯벌, 진흙길, 거친 돌길도 마다않고 걸어 다니느라 한해에 고무신이 아홉 켤레씩이나 떨어졌다.

문 전도사는 의약환경이 열악한 섬마을의 정신병자, 중풍환자, 크고 작은 병, 그 밖의 난치병 환자를 기도로 고쳐주어 의사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두고 싶어 하는 소원을 아시고 수양딸 백정희를 주셨다. 문전도사는 백정희에게 사랑을 듬뿍 쏟으며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했다. 백정희는 후일 전도사가 되어 복음 사역에 동고동락했고 문 전도사의 순교현장에 같이 있었기에 그의 순교의 증인으로서 생생한 기록을 남기게 했다.

문 전도사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목포경찰서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탈진한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라는 찬송을 불렀으며 에스더 4장 16절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구절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기로 각오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이 신안군의 섬에도 말려왔다. 이 때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과 합세하여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평소 교회를 증오하던 전 아무개란 자가 주동이 되어 교회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문 전도사는 배를 마련해놓고 양도천 전도사와 백정희 전도사를 피신하라고 권유했다. 두 전도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노라며 오히려 문 전도사에게 피신하라고 권유했으나 문 전도사는 “나는 늙어서 죽어도 좋으나 두 전도사님은 살아서 주의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있어서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돌봐야합니다”라고 하면서 두 전도사를 강권하여 범선에 승선시켰다.

이때 기회만 있으면 전도사부터 죽여 없애기로 앙심을 품고 있던 전 아무개 일당이 곤봉과 죽창을 들고 달려와 승선한 두 전도사를 배에서 끌어내렸다. “너희들이 도망가면 어디로 가, 감히 나를 속이고 도망가려고해? 이 악질반동분자들아” 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붓고 마구 때리며 짓밟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하고 말았다. 문 전도사는 간신히 두 전도사를 집으로 데려와서 피투성이가 된 옷을 벗기려하니 온몸이 퉁퉁 부어서 옷을 벗길 수 없었다. 문전도사는 가위로 옷을 잘라내고 보니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 오열을 하면서 정신을 잃다시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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