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창업, 그리고 시련과 은혜

그는 서울지점장이 되자 우선 성결교회를 찾아 돈암동성결교회에 등록했으며 교회 근처에 집을 장만했다. 그러나 1943년에 성결교회가 해산되자 신앙생활을 위해 근처 감리교회에 나갔다. 그는 일제말기 전쟁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사업을 버텨나갔다. 마침내 1945년 8.15 해방이 왔다. 그는 직장에서 민족차별을 받은 경험 때문에 독립국가가 된다는 기쁨에 감격스런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떠나면서 일본인 회사들도 문을 닫았고 그의 회사도 폐쇄됐다.

해방 직후 사회는 시끄럽고 무질서했다. 그는 정세를 당분간 관망하면서 창업 준비를 하다가 1946년에 ‘대한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업했다. 한국 최초의 보험회사였다. 그는 직원들을 신자들로 채우고 보험교육을 시켰다. 당시 해방 후 살기가 어렵고 사회가 어수선 할 때여서 보험이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보험에 대해 홍보활동을 하면서, 재건된 돈암동성결교회에 다니며 집사로 충성했다.

그의 신앙과 공로가 인정되어 1950년 4월 10일에 돈암동교회 장로로 장립받았다. 그러나 2개월 후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그는 급히 남쪽으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개월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그는 돌아와 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썼으며 가난한 신자들을 돌보는데 물질로 봉사했다. 사업은 조금씩 번창하기 시작했고 그는 교단 장로회 제2대 회장(1954-56)으로 모든 모임을 자비로 봉사하는 열심을 다했다.

그는 1966년에 교적을 무교동 중앙성결교회로 옮겼다. 어느 모임에서 중앙교회 황성택 목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고, 또 성결교회의 어머니교회라는 매력 때문이었다. 그는 1971년 춘기심령부흥회 때 강사 이만신 목사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기는 처음이어서 그는 한없이 울었고, 더욱 충성을 다짐했다. 은혜를 받은 기념으로 그는 수양관 건립을 위해 막대한 헌금을 했다. 그의 헌금으로 산곡기도원의 부지를 매입했고, 건축할 때도 본관건축비를 제공하여 기도원 본관건물 명칭이 그의 호인 운경(雲耕)기념관이 되었다.

그에게 큰 시련이 왔다. 그는 1970년 대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정보부장은 정치자금을 요구했다. 회사를 다 팔아야 할 막대한 자금이었다. 이를 거절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불이익을 당할 줄 알면서도 그는 신앙양심상 불의에 동조할 수 없어서 거절했다. 그러자 정치적 압력을 가해 그는 평생을 일궈 온 사업을 내주고 떠나야 했다. 그는 심한 분노와 허탈감으로 기도원에서 평생 처음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 결과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의 말씀과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깊은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세상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때부터 매월 수 십 명의 교회 개척자와 미자립교회 전도자들에게 송금하여 전도사역에 힘썼다. 직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을 받게 했다.

그는 가족 중 둘째 딸 내외를 보면 가슴이 아팠다. 사위가 불교신도회장의 아들이어서 전도하지 못한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갑자기 췌장암으로 입원했다. 둘째 사위 내외가 간호하러 왔을 때 그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으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그 말에 금방 응답이 왔다. “예. 믿겠습니다.” 오늘의 중앙교회 윤주탁 장로가 바로 그였다.

건강을 회복한 후, 강원도에 삼척탄좌주식회사를 설립, 초대 회장을 지냈고, 또 고향에 대한플라스틱공업주식회사를 설립, 고향 주민들에게 경제혜택을 주었으며, 낡은 고향교회를 새로 잘 지어 봉헌하므로 신앙의 빚을 갚는데 힘썼다. 그는 1994년 7월 25일 이 땅의 사명을 다 마치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고향으로 가서 주님의 품에 안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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