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소명감으로 전도자가 되어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시어머니는 큰 시숙이 모시게 되어 홀로 남게 된 문준경은 결혼 후 20년 동안 살아온 등선마을을 떠나 목포의 큰 오라버니 댁 근처로 옮겼다. 목포 북교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프고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나이 37세, 1927년 3월 5일 여느 때와 같이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좀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자신과 똑같은 또래의 점잖은 부인이 가만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가 처음 보는 성경과 찬송가를 꺼낸다.

“자매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뜨거운 지옥 불구덩이에 빠집니다. 자매님, 사는 게 얼마나 헛되고 힘듭니까? 이런 세상에 믿을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믿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에 나아가서 예수님에 대해 더 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부인의 친근감에 이끌려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처음 보는 부인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에게 약속한 대로 주일이 되어 부인을 따라 북교동교회에 나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북교동교회의 담임 장석초 전도사는 한학자로서 한시와 고전을 두루 섞어가며 구수하게 설교를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문준경은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여 1928년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완전히 변화되어 은혜가 충만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여 교회에 나간 지 1년 만에 학습, 세례 받고 1928년 6월 압해도의 개척교회를 들락거리며 전도하고 목포의 한 지역을 맡아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힘썼다. 세례 받은 지 1년 남짓하여 집사의 직분을 받았다. 집사가 된 그는 자고 깨면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에 힘썼다.

1931년 이성봉 전도사가 목포교회에 부임하자 날마다 교인들이 늘어 놀랍게 부흥하였으며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 목포 전체로 확산되어갔다. 낮에는 삯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성경을 읽거나 교회에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던 문준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희망과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적 스승인 이성봉 전도사를 만나게 되어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문준경은 평신도 신분으로 전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죽을 때까지 말씀을 전하고 싶은 소원이 불같이 일어났다. 또한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깨치고 싶었다. 한글을 깨쳐 성경을 열심히 읽지만 그 속에 담김 뜻을 헤아리기란 어려웠다. 그녀는 그로부터 하나님께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불철주야 기도하면서 매달렸다.

문 집사는 1931년 5월에 이성봉 전도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경성성서학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면접과정에서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청천병력 같은 통보를 받게 된다. “우리학교 규칙상 남편이 있는 부인은 입학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중간에 남편의 반대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또 졸업 후에도 전도부인으로서 활동하려면 육아나 가사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남편이 쉽사리 허락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혼이거나 남편이 사별한 부인의 경우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그녀는 원장을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자신은 결혼한 부인이지만, 생과부로 살고 있는 사정을 말하면서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원장은 청강생으로 허락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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