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부흥과 인민군에 끌려간 아들 위한 철야기도

역리 기도소가 부흥되고 집이 좁아서 예배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신자들이 교회를 새로 짓기로 하고 성의껏 헌금했다. 가난한 시골 성도들의 헌금은 90원이었다. 이 소식을 알고 총회에서 건축비로 500원을 보내 성도들이 힘을 합해 지금의 역리교회의 언덕땅을 구입, 10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넓은 교회를 건축하여 1928년 10월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헌당식과 동시에 역리기도소가 교회로 승격되었으며 총회에서는 윤순탄 전도사를 한인업 전도사를 돕는 교역자로 파송했다. 이렇게 되자 한 전도사는 윤 전도사, 신한나 집사 셋이 전도팀을 구성하여 인근 여섯 마을을 다니며 전도했다. 그들의 전도로 용동리에서 강현선 청년이 예수를 믿고 역리교회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신학교에 진학해서 성결교회 목사로 충성했다. 특히 신한나 집사는 윤순탄 전도사와 단짝이 되어 부녀자들을 찾아다니며 기도와 전도로 많은 부녀자들을 전도, 역리교회를 탄탄한 교회가 되도록 했다.

성결교회가 1943년 일제에 해산되었다가 우리나라가 해방되어 역리교회는 재건된다. 하지만 재건한 역리교회는 얼마 후 1950년 6.25 전쟁을 만나 고통을 겪는다. 그 중 신한나 집사에게 큰 고통이 왔다. 인민군이 들어와 한집에 한명씩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강제 징발했다. 신한나 집사의 세 아들 중 위로 둘이 숨고 막내 영수가 끌려갔다. 영수는 한나 집사가 가장 사랑하여 믿음의 인물이 되라고 아명도 요셉으로 지었다. 21살 난 요셉이가 끌려갔으니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어서 한나 집사는 낙심했으나 곧 정신을 차린 후, 밤마다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로 매달렸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요셉이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쳤어요. 불행히도 인민군에 끌려갔지만, 하나님이 전쟁 속에서도 살려 돌아오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해주세요.” 그녀의 아들을 위한 철야기도에 신자들도 가끔씩 동참해서 함께 기도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위로받지 못한 신앙을 아들 영수에게 쏟아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컸다.

한편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간 영수는 강제로 끌려온 다른 청년들과 같이 온양을 지나 대덕군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사격 등 기초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수 천 명의 의용군들을 낙동강 전투에 투입하려고 경상도로 내려가도록 했으나, 마침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은 북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로 조치원에서 청주 쪽으로 빠져 태백산맥을 타고 이북으로 가려고 작전을 바꿨다.

그렇지만 경상도에서 북진하는 유엔군과 국군을 만나 전투가 벌어져 전투경험이 없는 순진한 의용군들이 무더기로 죽었다. 요셉은 앞과 옆에서 싸우던 친구들이 총 맞아 죽는 속에서도 총알이 비켜갔다. 수 천 명 의용군 중 산 사람은 겨우 5명이었다. 그들은 유엔군의 포위 속에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전영수는 유엔군의 포로로 청주형무소로 가니 그곳에 인민군 포로 수 천 명이 있었다. 어느 날, 포로 심사를 받기 위해 그들이 대구로 이송하여 심사를 받다가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 그는 걸어서 고향으로 왔다. 끌려간 지 만 3년 만이었다.

가족은 물론 온 마을의 경사였다. 사람들마다 ‘어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철야기도를 했다’는 말을 했고 요셉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앙에 매진했다. 마침내 1970년 4월에 전영수가 장로장립을 받고 충성했다. 이 날 신한나 권사는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기뻐했다. 신한나 권사는 1976년 87세로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 받았고, 성도들의 애도 속에 승리의 삶을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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