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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혁 장로는 평소 근검과 절약, 그리고 봉사의 삶을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최고로 여겼다. 그는 사회의 기반은 신뢰성으로 보고 ‘국민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사회의 기틀이 무너진다’며 학생들에게 정직성을 자주 강조했다. 그는 음식물 중에서 꿀과 참기름에 가짜가 너무 많아서 국민들의 정직성에 대해 개탄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하루는 그에게 안동에 사는 잘 아는 김 모 장로가 찾아왔다, 김 장로는 서울신대 출신이지만 목회를 접고 장로로 안수 받아 교회 봉사에 앞장을 서는 분이다. 김 장로는 “장로님. 제가 양봉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자금을 대주시면 재기하겠습니다”하고 부탁했다. 김성혁 장로가 “장로님. 절대로 가짜 꿀을 팔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약속하지요. 저는 정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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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5.1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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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호 교수의 글을 이어서 소개한다.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그는 1년 동안 과외수업으로 모은 돈을 뭉치로 싸들고 대구의 우시장으로 간다. 그는 그 돈으로 큰 암소 10마리를 산 후, 소를 판 사람들에게 암소 고삐를 각자 쥐고 줄을 지어 당시 그가 다니던 교회로 가게 한다.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는 이미 그가 선발한 10명의 장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먼저 그들에게 ‘밖에 있는 암소 한 마리씩을 장학금으로 줄 터이니, 잘 길러서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팔아서 계속 등록금으로 사용하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을 한다. 그리고 모두 교회 마당으로 나와 암소 고삐를 한사람씩 들려준다. 장학생들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암소 고삐를 쥐고 자기 집을 향해 간다. 이것이 소위 ‘암소 장학금’이다. 당시 대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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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05.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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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의 날이 왔다. 그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던가. 그는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민족의 앞날은 오직 교육에 있다는 확신으로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평양왕성중학교 영어교사로 들어가 열심히 가르쳤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38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나눠졌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가 있었던 북쪽 땅에서 소련군과 함께 나타난 김일성이 소련의 힘을 업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나갔고, 주일에도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신자들이 주일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발생했다.그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선교사들의 나라인 미국이 다스리는 남한으로 넘어갈 것을 결심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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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5.0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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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달막한 키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언제나 손에는 검정색 손가방을 든 촌로의 아저씨였다. 이마는 햇빛에 그을려 반질반질하고, 양복의 소매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해졌으나 생기에 찬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얼른 외모만 보면 ‘채권 삽니다’하고 골목을 몰아대던 당시 흔한 채권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후반부터 거의 30년 동안 대구에 있는 국립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어과 김성혁 교수라니, 놀라울 뿐이다. 김 교수는 그가 살던 수성교와 경북대학교 사이 4킬로쯤 되는 길을 언제나 걸어서 정시에 출퇴근했다. 그의 옆으로 학교 교직원 버스가 지나가도 본체만체했고, 동료교수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손을 흔들어도 고개를 우로 약간 흔들고 만다. 그의 작은 가방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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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04.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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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 최창도 목사는 인천평동교회로 부임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집중적인 전도 활동, 그리고 성도에 대한 유별난 사랑의 보살핌으로 온 성도가 은혜 충만한 가운데 전도와 봉사의 불이 붙어 교회가 활기차게 부흥 성장했다. 교회당이 비좁아 밖으로 확성기를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주일학생들이 교회마당에 모이면 일반초등학교 같아 보였고 구역회가 활성화되어 7~80명이나 되는 구역도 있었다. 1957년 4월 14일에는 최 목사의 위임식을 거행하는 등 교회가 부흥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1960년 봄에 몇몇 집사들이 평동교회를 떠나 화수동교회를 세워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1961년 3월에 최창도 목사는 일본에 있는 누이 최상신 전도사의 아들 최광욱(조카)의 주선으로 재일대한기독교의 초청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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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4.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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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생활고에 지친 어느 날, 장남 대벽이 찾아와서 온 식구가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대벽은 혼자 부산으로 내려오다가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낙동강을 헤엄쳐 건너 부산에 도착, 가족들과 기쁨의 상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전황이 급박해지고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군에 입대시키면서 대벽은 재회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 UN군에 입대했다.최창도 목사는 북진하는 아군을 따라서 천안으로 돌아와 보니 여러 성도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는 천안경찰서장에게 석방을 요구했다. 서장은 “목사님, 말도 마세요. 빨갱이에게 협력해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장본인들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최 목사는 굽히지 않고 경찰서장과 간부들에게 “당신들은 총대를 들이대고 죽인다고 협박하면서 협력하라고 할 때 협력 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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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04.13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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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남녘하늘을 바라보며 최 목사를 그리고 있는데 어느 날 남한에서 이정실 집사가 찾아왔다. 그로부터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사모는 5남매를 이끌고 트럭을 타고 이 집사를 따라 사리원에 도착했다. 검문하기에 “병 고치러 간다”고 하여 최 목사 가족은 통과되었으나 이 집사는 검문에 걸려 하차 당했다.난감해진 최 목사 가족은 가까스로 교회를 찾아가서 한 밤중에 기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모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밖에 나가 트럭을 탔고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 목사의 가족이 배를 타고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총소리가 났고 우왕좌왕하는 중 이 집사가 나타나 이 집사의 안내로 38선을 넘어 자유의 땅 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 목사 가족은 월남 피난민을 위한 천막촌에서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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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04.0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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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도는 성서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축호전도대로 임명되어 축호전도 실습기간에 황해도 겸이포교회에 파송됐고, 주임교역자를 도우며 전도활동을 펼쳐 좋은 성과를 나타냈다. 축호전도 실습기간에 경성신학교는 신학생을 시내 각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파송하여 훈련시켰는데 최창도 목사는 무교동교회 주일학교로 파송되어 봉사했다. 그는 헌신적으로 사역해 주일학생 수가 날로 늘어나서 전도자의 실력을 인정받았다.1939년 신학생으로서 이천교회의 전도사로 파송된 최창도는 가족과 함께 기거하며 교회를 부흥시켰다. 졸업 1년을 앞두고 경성신학교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대학인가를 받으면서 그 또한 사방모자를 쓰고 대학생 교복을 입었다. 당시 경성(서울)에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연희전문(연세대), 보성전문(고려대)과 경성신학생들이 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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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1.03.3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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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에 중포(重砲), 대포(大砲), 소포(경포, 輕砲) 별명이 붙은 세분 목사가 있었다. 중포 최창도 목사, 대포 천세광 목사, 소포 김정호 목사였다. 통틀어 삼포(三砲)로 통했다. 중포는 155~175mm 포, 대포는 105mm포, 경포는 박격포다. 최창도 목사는 피를 토해내듯 열정에 찬 설교나 연설로 청중의 심령을 움직이고 확신을 갖게 하여 중포라는 별명이 붙었다.그는 열정적인 전도자로, 부흥사로, 목회자로, 선교사로서 성결교회를 큰 교단으로 만든다는 야심찬 의욕으로 불철주야 기도하고 동분서주 전도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원시키고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는 좁은 한국에서 전도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일본, 아르헨티나, 미국에 건너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으니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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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3.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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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명 목사가 7년 동안 시무한 부여중앙교회에서의 목회는 개척교회 신자들을 영적 말씀으로 양육해 신앙의 뿌리를 교회에 깊게 내리게 한 목회였다. 그래서 부여중앙교회는 초창기 연륜이 짧고 신자들은 많지 않았지만 백년대계의 기초를 튼튼히 쌓을 수 있었다. 그는 1962년에 경기도 안성교회에서 청빙되자 이를 마지막 목회지로 각오하고 부임했다.1962년 4월 우리 교단이 결국 분리되어 예성총회가 조직되었고 많은 교회와 교역자들이 보수를 주장하는 예성으로 갔다. 당시 그가 부임한 안성교회는 담임목사가 교회를 예성으로 끌고 가려고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극구 반대하는 두 명의 집사를 일방적으로 제적한 후 예성으로 가버린 상태였다. 교회는 상처가 깊었고 얼마동안 후임자가 오지 않아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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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3.1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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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새해를 맞아 임종명 장로는 이상한 감회에 젖는다. 그동안 새해를 맞으면 일반 사람들처럼 반드시 새로운 희망과 결심을 세우고 기도했었다. 그는 올해 만 50세가 되었다.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는 장로요,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중학교 교장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반백의 나이가 되고 보니 무엇인지 허전한 마음이 생겨났다. 지금보다 더 높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그는 3월 초에 서울 아현성결교회 내에 있는 수도성서학원(야간부)에 편입했다. 그가 숭실대학 졸업자이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3년 과정 중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학원의 학생들은 임 장로처럼 늦게 헌신한 나이 지긋한 집사나 장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일을 본 후, 저녁에 기차로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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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3.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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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명은 북한에 환멸을 느껴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준비하고 목사님을 찾아 기도를 받은 후,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사춘기가 된 자녀들과 함께 눈물의 가정예배를 드린 다음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가족을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1947년 봄은 사실상 남북이 휴전선을 통해 오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휴전선 북측은 소련군에 의해 경계가 한층 강화되어 남북의 출입이 쉽지 않았다. 38선을 몰래 넘다가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들이 북한 사회에 나돌았다. 그는 고향 근처에서는 많이 알려진 인물이어서 낮에는 중절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친구가 사는 사리원으로 백 여리를 며칠 동안 걸어서 갔다. 그는 친구와 며칠 동안 지내면서 1년 전에 서울을 몰래 다녀 온 친구를 통해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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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3.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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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명은 북한에 환멸을 느껴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준비하고 목사님을 찾아 기도를 받은 후,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사춘기가 된 자녀들과 함께 눈물의 가정예배를 드린 다음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가족을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 1947년 봄은 사실상 남북이 휴전선을 통해 오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휴전선 북측은 소련군에 의해 경계가 한층 강화되어 남북의 출입이 쉽지 않았다. 38선을 몰래 넘다가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들이 북한 사회에 나돌았다. 그는 고향 근처에서는 많이 알려진 인물이어서 낮에는 중절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친구가 사는 사리원으로 백 여리를 며칠 동안 걸어서 갔다. 그는 친구와 며칠 동안 지내면서 1년 전에 서울을 몰래 다녀 온 친구를 통해 38선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1.03.0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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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명은 부자 집과 신앙인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전문 학생이 된 것이 자기만의 행운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 그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3.1독립운동 이후1920년대 조선의 대학생들은 최고의 지성인을 뽐낼 수 있지만, 시대적 아픔을 안고 있었다. 당시 대학생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방종파로, 일본의 식민지 백성인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비관하여 술과 기생집을 전전하며 방종한 생활로 빠져든 학생들이다. 두 번째는 현실파로, 망국의 슬픔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여 일본을 조국으로 알고 출세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다. 세 번째는 계몽파로,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무지(無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방학 때마다 시골에 가서 야학을 열고 청소년이나 부녀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
2011.02.16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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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명(林宗明)은 20세기가 시작된 초기인 1903년 7월 20일에 황해도 은율군 장년면 서부리라는 농촌마을에서 출생했다. 은율군은 구월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평야지역으로 농산물이 풍성한 곡창지대인데,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종명의 부친 임원규 씨였다. 임원규 씨는 한학자였지만, 당시 소래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성경을 전하는 권서인들이 주는 한문성경을 읽은 후에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권서인들이 그의 집에 들릴 때마다 사랑방에 묵게 하고 잘 대접하면서 복음진리에 대해 의문점을 묻고 신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 이웃 마을 관해리에 세워진 교회를 찾아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1년에 한번 꼴로 순회하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영수로 임명되었다. 영수(領袖)는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2.0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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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원 목사는 청주에서 2년 동안 시무하다가 1948년 4월 김응조 목사의 권유로 돈암동교회로 부임했다. 장 목사는 김응조 목사가 대전감리목사로 있을 때 그에게 집사로 임명되고 그의 권유로 복음사역자의 길에 들어선 바 있다.그의 목회관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그의 부흥관은 조금 달랐다.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여서였는지, 젊은이들을 많이 불러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청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유능한 청년들을 교계에 진출시킴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예술계, 문화계, 실업계, 정치계, 관계에 배출시켰다.이렇게 영혼 구원에 열심이었던 장 목사는 1950년에 돈암동교회를 시무하면서 부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목사가 세속적인 명예를 좇는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다. 그 후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1.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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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원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만주성결운동의 전진기지가 될 만주의 수도 신경의 개척자로 파송되었다. 당시 신경은 광활한 만주평야 한복판에 새로 건설된 도시로, 장 목사는 모여든 동포들의 지도자요 이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파송되었던 것이다.신경교회 개척은 조선성결교회본부의 주력사업이었기 때문에 교회개척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마침 만주제국과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종교 정책에 따라 만주에 있는 조선의 모든 교파들을 조선기독교로 통합되어야만 했다. 결국 1941년 12월에 만주에 있는 성결교회도 조선기독교총회 산하에 합동되고 본국의 교단본부와는 정치와 행정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장 목사는 1942년 봄에 만주조선기독교총회 인사정책에 따라 봉천 근처 사평가시 조선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이 교회는 원래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1.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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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회개의 불이 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새벽에 한 여자가 나와서 벌벌 떨면서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 전도부인이 회개를 재촉하고 구원의 도리를 가르쳤다. 그 여인은 자신이 지은 흉악한 죄를 다 토해냈다. 특히 떡 장사할 때 50원을 더 받은 것을 자복하고 즉시 금전을 내놓기도 했다. 회개의 불은 ‘홍’이라는 여자에게 떨어졌다. 이 여자는 남의 소실로 있으면서 2년동안 교회를 다녔다. 이 여자가 죽어가듯 한창 애를 쓰다가 죄를 토한다.바로 10월 18일 주일이었다. 설교를 한 후에 통성기도를 시켰다. 성신의 역사가 각 사람에게 충만했다. ‘안’이라는 자매는 수년 전에 모 여관에서 고용살이를 할 때 10원을 절취한 일을 자복했다. 갚아야 천당 가고 갚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1.1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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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933년이 되었다. 장두원은 자상한 어머니, 다정다감한 누님과 같이 모시던 유진심 전도부인이 들려준 경성성서학원의 건학정신과 교수 학생간의 전통적인 인간관계와 학생 생활분위기를 기억하며 4월 1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그는 1936년 경성성서학원 수학을 마치면서 전도사로 임명되어 만주 무순교회의 주임교역자로 파송 되었다. 이때 만주 전역에 20여개의 성결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성결교회는 1924년에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동만주 일대에서 해외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은 남만주 일대에도 성결교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만주에는 80만의 조선 농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군부의 이간질로 말미암아 중국인과 중국패잔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조선농민을 농토를 빼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1.01.0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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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원 목사는 성서학원 수양생활 3년에 ‘천둥의 기도장이’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학한 다음 날 새벽부터 신학생들이 다니는 아현교회의 천정이 무너져 내려앉을 듯이 천둥치듯이 고함을 지르고 마루가 부서지도록 두드리며 요란하게 기도했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다. 새벽기도가 끝날 때면 제자리에 앉아있는 법이 없었다. 기도를 시작할 때의 자리가 아니고 딴 자리에 있기가 일쑤였다. 그는 기도할 때 천둥치듯 소리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쥐어뜯으며 떼굴떼굴 굴러다녀서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왼편자리에서 오른편자리로 옮겨있었다. 그럴 때마다 같이 기도하던 딴 학생들은 이리저리 밀리다가 쫓겨나가는 수도 있었다.장두원 목사는 1908년 12월 19일에 충남 부여군 남면 대신리에서 인동 장씨인 아버지 장석범 씨와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2.29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