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그리고 입신

장두원 목사는 성서학원 수양생활 3년에 ‘천둥의 기도장이’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학한 다음 날 새벽부터 신학생들이 다니는 아현교회의 천정이 무너져 내려앉을 듯이 천둥치듯이 고함을 지르고 마루가 부서지도록 두드리며 요란하게 기도했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다.

새벽기도가 끝날 때면 제자리에 앉아있는 법이 없었다. 기도를 시작할 때의 자리가 아니고 딴 자리에 있기가 일쑤였다. 그는 기도할 때 천둥치듯 소리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쥐어뜯으며 떼굴떼굴 굴러다녀서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왼편자리에서 오른편자리로 옮겨있었다. 그럴 때마다 같이 기도하던 딴 학생들은 이리저리 밀리다가 쫓겨나가는 수도 있었다.

장두원 목사는 1908년 12월 19일에 충남 부여군 남면 대신리에서 인동 장씨인 아버지 장석범 씨와 어머니 천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감기를 모르고 자랄 정도로 무병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며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유교적 예법과 가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성격은 발랄했고 사물에 대한 처리도 단 1분도 끄는 법이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나라가 어지럽던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개화에 먼저 눈이 뜬 아버지는 서당에서 공부하는 두원을 면내에 있는 신식교육기관인 홍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두원이는 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금천리교회(현 대선교회) 엄경엽 전도사와 나영은 전도부인의 인도를 받아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하여 성경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그는 1923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방학이면 본가로 돌아와 부모 곁에서 예의범절을 익히면서 고향교회의 전도사를 도와 봉사했다. 그는 공주 고등보통학교 졸업을 1년여 앞둔 1927년 봄 금천리교회에서 대전교회의 감리목사 전성운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고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전담교역자 없는 금천리교회에서 유진심 전도부인을 도와 교회를 부흥시켜나갔다. 유진심 전도부인은 주로 심방에 주력했고 장두원은 신지식을 갈망하고 있는 마을 청소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여 교육을 시키며 교회를 부흥시켜 나갔던 것이다.

“금천리교회는 점점 부흥되어가는 중 남녀신자들은 자립정신이 왕성하였다. 헌금, 전도, 심방 등이 실로 모범적이며 그 빈핍한 가운데 예배당건축을 목적으로 200원을 헌금하여 금년 안에 건축될 줄로 믿고 기도하는 중이다.(제4회 연회록 p.11.)”

금천리교회는 대전지방 안의 23개 교회 가운데 교세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5개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932년 신년 사무총회에서 김응조 금천리교회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감리목사로부터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로 알고 감사하고 순종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1932년도에 입학이 어렵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 때는 조선성결교회가 가장 크게 성장하는 때여서 성서학원 입학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성서학원은 신입생을 입학시험에 의해 뽑지 않고 전국교회의 주임교역자와 지방 감리목사가 추천한 사람을 순서대로 뽑았다. 따라서 신입생 선발은 미리 1년 전에 뽑아놓게 되었던 것이다.

장 집사는 도리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직 가사의 정리도 안 되었고 또 병고 중인 할아버지의 곁을 갑자기 떠난다고 여쭙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사정을 아셨는지 내 사정대로 1년 뒤인 1933년 봄에 신입생으로 입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셔서” 라고 또 한 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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