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성서학원 수학과 첫 목회지 만주 무순교회

어느덧 1933년이 되었다. 장두원은 자상한 어머니, 다정다감한 누님과 같이 모시던 유진심 전도부인이 들려준 경성성서학원의 건학정신과 교수 학생간의 전통적인 인간관계와 학생 생활분위기를 기억하며 4월 1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1936년 경성성서학원 수학을 마치면서 전도사로 임명되어 만주 무순교회의 주임교역자로 파송 되었다. 이때 만주 전역에 20여개의 성결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성결교회는 1924년에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동만주 일대에서 해외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은 남만주 일대에도 성결교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80만의 조선 농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군부의 이간질로 말미암아 중국인과 중국패잔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조선농민을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로 쫓겨나왔다. 동포들은 도시에 수용소를 세워 그들을 수용했다. 이 때 박문익 신원식 두 전도사의 위문활동으로 봉천교회와 북릉교회가 세워졌고, 포하교회와 구련톤교회, 하얼빈교회, 그밖에 몇몇 곳에 기도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동 만주에서 남부만주로 성결운동이 번지기 시작했다.

무순교회는 1932년 4월 20일에 북릉교회가 동쪽 40여리 밖에 세운 기도처였다. 1933년 7월 17~18일에 본부이사회가 파송한 이건 목사가 시찰하고 돌아간 뒤에 정식 설립된 교회다. 장두원 전도사는 성서학원 수양 중에 활천에서 수용소의 지원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읽고 성서학원의 모든 수양생들과 함께 1년 내내 점심을 굶고 기도하며, 헌금을 수용소로 보낼 때부터 만주에 있는 동포 전도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장 전도사는 1936년 7월 1일에 무순교회에 부임했다. 교회가 창립된 지가 4년인데 교세가 약하여 집회인원수가 평균 25명이었고 교회분위기가 냉랭했다. 그는 불과 4개월 만에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기적을 체험했다. 그는 새벽과 밤으로 매일 2차씩 열심히 간구했다. 주위에서는 기도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아셨다. 7월 31일에 8년 동안 목이 곧고 완고하던 아내가 꼬꾸라졌다. 회개의 문이 열려서 모든 죄를 자복했다. 그는 아내의 구원에 대하여 절망까지 했는데 주께서 먼저 아내를 회개시켯고, 이는 부흥의 불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8월이 되자 교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새벽과 밤으로 기도의 불이 일어났고, 낮에도 기도소리가 끊일 새가 없었다.

매일 울음소리가 나자 ‘예배당에 초상이 났느냐?’고 외인들은 비아냥거렸다. 한 부인이 심히 고통스러워 하다가 사발 두 개를 절취한 것을 돌려주고 감정관계로 경원해 오던 이를 찾아가서 회개하고 사과했다. 그 부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체험하고 새 힘을 얻어 열심히 기도하여 성신의 불세례까지 받았다.

9월이 되니 성신의 훈기가 뜨거워지고 모든 심령이 은혜를 절정으로 간구했다. 낙심했던 두 가정이 교회로 돌아왔고 타락했던 6명이 돌아왔고 새로운 구도자가 여러 명 나오게 되었다. ‘안’이란 자매는 전도하는 전도부인에게 덤벼들어 “예수를 믿는 것도 자유요,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인데, 뭘 믿어라 말라 하느냐?”고 비방했다가 “아무렴 믿는 것도 자유고 믿지 않는 것도 자유지,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때는 자유하지 못하고 멸망 받습니다”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믿기로 결심하고 바로 다음주일부터 교회에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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