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대 활동과 해방 전후 목회 사역

최창도는 성서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축호전도대로 임명되어 축호전도 실습기간에 황해도 겸이포교회에 파송됐고, 주임교역자를 도우며 전도활동을 펼쳐 좋은 성과를 나타냈다. 축호전도 실습기간에 경성신학교는 신학생을 시내 각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파송하여 훈련시켰는데 최창도 목사는 무교동교회 주일학교로 파송되어 봉사했다. 그는 헌신적으로 사역해 주일학생 수가 날로 늘어나서 전도자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9년 신학생으로서 이천교회의 전도사로 파송된 최창도는 가족과 함께 기거하며 교회를 부흥시켰다. 졸업 1년을 앞두고 경성신학교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대학인가를 받으면서 그 또한 사방모자를 쓰고 대학생 교복을 입었다. 당시 경성(서울)에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연희전문(연세대), 보성전문(고려대)과 경성신학생들이 사방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는 1941년 4월 10일에 대학인가를 받은 경성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졸업을 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경안교회(현 광주교회)로 전출되었고 1943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일제의 성결교회 탄압이 극심할 때였다. 우리나라를 찬탈한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침략하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은 힘이 부족하여 패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한국기독교를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온갖 박해를 가했다. 더욱이 성결교회는 재림문제로 타 교파보다 더 큰 박해를 받았다.

일제의 입장에서 예수재림신앙은 신격화된 천황의 지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1943년에 신학교와 교단이 폐쇄되고 300여 교역자와 직원들이 투옥되는 변을 당했다. 최 목사도 1944년 5월에 광주경찰서에 투옥되어 7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교회는 폐쇄되고 신도들도 잃어 갈 곳이 없는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목수생활을 하며 연명했다. 마치 엘리야가 아합 왕의 박해를 받아 초야에 숨어들어 때를 기다리는 신세와 같았다.

8·15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자 최 목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평양으로 가서 임정교회의 문을 열고 한없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산당들이 임정교회의 문을 연데 대한 반감으로 유치장에 구금시켜 몇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6년 석방된 최 목사가 또다시 감금된다는 정보를 알고 한 밤중에 성경과 찬송가만을 가방에 챙겨 남겨 둔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기도한 후 곤히 잠든 천진난만한  6남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떠났다.

그는 밤에만 걸어서 진남포항구까지 도착했지만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타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며칠을 선창가에서 기다려 배를 탔다. 초겨울 바닷바람은 살을 에는듯이 차갑고 매서웠다. 항해 중 해주연안에 운무가 자욱해 앞길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스라엘의 홍해기적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안개가 뒤로 돌아 해주연안을 가리고 남쪽이 훤하게 트여 뱃길이 열리며 그는 무사히 월남했다.   

최 목사는 무교동교회 이영신 집사 댁에서 기거하면서 전도대에 소속하여 복음전파에 동분서주했다. 최 목사가 월남한 이듬해 2월 15세의 장남 대벽이 엄동설한에 대동강을 헤엄쳐서 월남했다. 대벽은 한명우 목사의 주선으로 대경상업학교에 진학했고 부자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최 목사는 북쪽에 남겨둔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데 38선을 8차례나 왕복한 이정실 집사가 찾아와서 최 목사의 가족들을 월남시키겠다고 약속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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