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정년 사임을 반대한 교인들

임종명 목사가 7년 동안 시무한 부여중앙교회에서의 목회는 개척교회 신자들을 영적 말씀으로 양육해 신앙의 뿌리를 교회에 깊게 내리게 한 목회였다. 그래서 부여중앙교회는 초창기 연륜이 짧고 신자들은 많지 않았지만 백년대계의 기초를 튼튼히 쌓을 수 있었다. 그는 1962년에 경기도 안성교회에서 청빙되자 이를 마지막 목회지로 각오하고 부임했다.

1962년 4월 우리 교단이 결국 분리되어 예성총회가 조직되었고 많은 교회와 교역자들이 보수를 주장하는 예성으로 갔다. 당시 그가 부임한 안성교회는 담임목사가 교회를 예성으로 끌고 가려고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극구 반대하는 두 명의 집사를 일방적으로 제적한 후 예성으로 가버린 상태였다. 교회는 상처가 깊었고 얼마동안 후임자가 오지 않아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제적된 두 명의 집사를 해벌하고 집사 직을 복직시키고 격려했다. 화해의 목회가 그의 목회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지런히 심방하며 신자들이 말씀의 생활화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영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며 열심히 가르쳤다.

그가 안성교회에서 시무한 11년 동안(1962~1972)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제개혁이 시작,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는 격동기였다. 해마다 농촌청년들이 임금이 많은 도시로 떠나면서 농촌의 인구가 줄고, 농촌교회의 신자들도 대거 도시로 떠나 교회마다 비상이었다. 안성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안성교회 90년사’에 의하면 1961년 교인수가 303명이던 것이 1965년에는 절반으로 줄어 150명으로 나타났다. 그 2~3년 사이에 장로 1가정, 집사 10가정이 도시로 이주한 기록을 보면 당시 농촌교회마다 고통을 겪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믿을만한 집사와 장로가 교회를 떠나니 고통이 컸지만, 그는 환송예배를 드려주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강조했다. 신자들이 계속 도시로 떠나자 교회의 예산집행에 어려움이 조성되었다. 그는 예산보충을 위해 해마다 추수감사 특별헌금을 위한 직원회를 열고, 가장 먼저 쌀 2가마를 작정했다. 이 솔선수범에 따라 직원들이 1가마니, 2가마니씩 작정해서 예산금액 20가마를 확보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또 1967년 교회창립 50년 희년이 되자, 그는 서울과 미국에 사는 아들들에게 연락해서 기념예물을 권했다. 그래서 미국 아들이 50$을 보내오고, 서울 아들이 응접세트 1조를 선물하자, 이에 감동받은 한 여 집사가 교회 전등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는 헌금을 했다.

그는 70세 정년을 1년 앞두고, 당회를 설득해 김 모 부목사를 부임케 하고, 1년 후 당회에 정년사직서를 제출했다. 당회는 아쉽지만 법에 따라 그의 사임을 받았다. 그리고 직원회를 소집해서 당회서기가 이를 보고하자 직원들이 반대했다. 직원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몇 년 더 시무하는 안과 무기한 계속 시무한다는 안이 맞섰고 투표 결과 무기한 계속 시무안이 가결됐다. 교단의 법도 이 교회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임 목사가 당황했다. 그는 8월 직원회에서 그의 사임을 받아줄 것을 다시 요청했지만 직원들은 안된다고 고집했다. 그는 직원들의 집에 심방을 가서 아들들이 사는 미국에 가서 여생을 편히 보내고 싶다고 호소한 결과 12월 직원회에서 겨우 은퇴를 결정, 12월 9일에야 은퇴예배를 드렸다.

그는 곧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교회 협동목사로 있다가 1980년 78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비록 18년의 짧은 목회생활이었지만 지성과 인격이 겸비한 신사적인 목회로 정년은퇴까지 보류시킬 정도로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목사의 본보기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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