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과 6·25전쟁, 그리고 교사의 삶

임종명은 북한에 환멸을 느껴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준비하고 목사님을 찾아 기도를 받은 후,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사춘기가 된 자녀들과 함께 눈물의 가정예배를 드린 다음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가족을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

1947년 봄은 사실상 남북이 휴전선을 통해 오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휴전선 북측은 소련군에 의해 경계가 한층 강화되어 남북의 출입이 쉽지 않았다. 38선을 몰래 넘다가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들이 북한 사회에 나돌았다. 그는 고향 근처에서는 많이 알려진 인물이어서 낮에는 중절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친구가 사는 사리원으로 백 여리를 며칠 동안 걸어서 갔다. 그는 친구와 며칠 동안 지내면서 1년 전에 서울을 몰래 다녀 온 친구를 통해 38선을 요령 있게 넘는 방법을 터득했다.

월남하는 방법은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산길을 걸어서 연안으로 넘어가는 세 가지 길이 있었지만 그는 담대하게 개성으로 기차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6.25전쟁 전의 개성은 시내 한 복판에 38선이 가로질러 갔기 때문에 경계선 중심으로 절반이 남한, 절반이 북한의 영토였다.

그가 탄 기차가 개성 역에 도착하기 전부터 북한군과 소련군이 기차 안에서 합동조사를 엄격하게 펼쳤다. 보따리를 든 사람들은 월남자로 생각하고 따로 세웠다. 그는 검문 차례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군인들은 그가 작은 가방 하나 든 것을 보고 물었다. “개성에 뭐 하러 왔기요?”, “학교 선생인데, 교육 사무를 보러 왔수다.” 그들은 그의 위아래를 살핀 후 무사히 통과시켰다. 며칠 후, 그는 남쪽 개성 땅으로 가는 길잡이를 만나 사례금을 주고, 밤중에 그의 안내를 받아 다른 길을 통해 남쪽 개성 땅에 몰래 들어갈 수 있었다. 위기 때마다 도우시는 하나님께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서울은 막상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땅이었다. 그는 며칠 후 주일이어서 대방동 장로교회가 눈에 띄어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는 월남한 사람들이 세운 교회로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그곳에서 평양 숭실대학 동창생을 만나 외로움을 덜었다. 일 년 전에 월남한 친구는 중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때 대학졸업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때여서 그는 친구의 알선으로 중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납북 출입이 어려웠던 당시여서 그는 가족의 월남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의 응답일까, 몇 달 후 그는 그의 큰 아들 익성이를 대방교회에서 만났다. 아버지의 소식이 없자, 죽을 것을 각오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해주에서 밀선을 타고 남한 땅으로 와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와 주일마다 황해도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대방동교회에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그는 즉시 아내와 자녀들을 만나 감사의 예배를 드린 후, 신길동에 더 넓은 집을 사서 옮기고 가까운 신길성결교회에 나갔다. 그는 교회의 장로로 취임한 후, 주일학교의 부장으로 아이들의 신앙교육에 힘을 쏟았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남침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피란을 떠나 부산까지 갔다. 그는 교회에서 만난 어느 교장의 도움으로 작은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 곧 전남 구례중학교의 교사로 갔다. 그리고 광주의 미션스쿨 숭일중학교 교감으로 승진했다가 평택의 팽성중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는 그의 신사적 인격과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주장하는 교육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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