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신경교회 개척과 옥고, 해방 후 청주교회 부임

장두원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만주성결운동의 전진기지가 될 만주의 수도 신경의 개척자로 파송되었다. 당시 신경은 광활한 만주평야 한복판에 새로 건설된 도시로, 장 목사는 모여든 동포들의 지도자요 이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파송되었던 것이다.

신경교회 개척은 조선성결교회본부의 주력사업이었기 때문에 교회개척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마침 만주제국과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종교 정책에 따라 만주에 있는 조선의 모든 교파들을 조선기독교로 통합되어야만 했다. 결국 1941년 12월에 만주에 있는 성결교회도 조선기독교총회 산하에 합동되고 본국의 교단본부와는 정치와 행정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장 목사는 1942년 봄에 만주조선기독교총회 인사정책에 따라 봉천 근처 사평가시 조선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이 교회는 원래 감리교였는데 만주의 교통요지이며 군사적 요지이기 때문에 일본 군부대에 소속된 조선인 군속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헌병대의 감시를 받는 교회였다.

장 목사는 그런 것에 조심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조선청년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7월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시달림을 받았다. 그렇게 감옥생활을 하다가 그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2년 1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장 목사가 옥중에 있는 동안 가족과 한 번도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으나 충성스러운 교인들은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가족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잘 먹고 자녀들도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음을 보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았다.

장 목사는 해방된 조국의 고향이 그리웠다. 교인들도 조국이 독립되었으니 교향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둘 씩 떠나갔다. 그러나 장 목사는 남아있는 교인이 있는 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침 중국의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의 군대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8·15해방 후 삽시간에 공산군이 중국 정부군을 무찌르고 만주일대를 관활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예배당이 공산군에게 징발되고 예배중지를 당하면서 장 목사와 가족들은 부득이 그해 11월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 11월 9일에 조선성결교회 재흥총회가 열렸고 일제에 빼앗겼던 성결교회의 문이 다시 열렸다. 장 목사는 그해 조치원교회에서 시무했으나 교단과 조치원교회 등의 자료에 시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다행히 그의 후임자인 오영필 목사 시무 때에 집사로 있었던 김동주 원로목사가 이를 증언한 바 있다.

장 목사는 1946년 7월에 청주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교인들이 모두 인정 많고 순박하고 부지런했다. 특히 금천리교회에서 봉사할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규암교회와 만주 용정교회 창립 신자인 충성스러운 박귀래 장로가 청주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장 목사는 청주교회에서도 만주교회에서와 같이 기도만능신앙을 강조하여 교회에 성령의 불이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유의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다. 기도와 신유의 역사가 부흥의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청주가 도청소재지이지만 현대적 의료기관이 적은 도시이며 술과 노름이 만연하여 육신의 병자들도 영혼의 병자 못지않게 많았다. 특히 청주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신유의 역사가 절실했다. 장 목사는 청주 일대에서 귀신들린 병자의 귀신 내쫓는데 능한 목회자로 알려졌다. 청주교회에서는 최병권 장문원 전문규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들이 후일에 목사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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