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장수와 같은 경북대 교수

“그는 작달막한 키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언제나 손에는 검정색 손가방을 든 촌로의 아저씨였다. 이마는 햇빛에 그을려 반질반질하고, 양복의 소매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해졌으나 생기에 찬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얼른 외모만 보면 ‘채권 삽니다’하고 골목을 몰아대던 당시 흔한 채권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후반부터 거의 30년 동안 대구에 있는 국립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어과 김성혁 교수라니, 놀라울 뿐이다.

김 교수는 그가 살던 수성교와 경북대학교 사이 4킬로쯤 되는 길을 언제나 걸어서 정시에 출퇴근했다. 그의 옆으로 학교 교직원 버스가 지나가도 본체만체했고, 동료교수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손을 흔들어도 고개를 우로 약간 흔들고 만다. 그의 작은 가방 속에는 그날 가르칠 영문 ‘타임’지나 ‘뉴스위크’, 그리고 영문 ‘다이제스트’를 한권씩 넣고 휘파람을 불며 시골 할아버지가 오일장에 가듯 그렇게 학교에 오갔다.”

1956년부터 30년 동안 대구 경북대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모습의 중년의 사나이를 자주 보았을 것이다. 위의 글은 60년대 대구에서 김성혁 교수에게 6년 간 영어 과외를 공부한 오영호 교수(인천대 명예교수)가 쓴 수필 ‘구두쇠가 되자’의 글 일부로, 당시 김성혁 교수는 대구나 경상북도 일대에서 ‘괴짜 교수’, ‘구두쇠 장로’ 또는 ‘한국의 간디’라고 알려졌다. 그가 누구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꼼꼼히 되짚어 보자.

김성혁(金成赫)은 500년의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11월 4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지족면 건지리에서 농사하는 부친 김이서의 3대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부지런해서 부모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성장하다가 8살 때에 거리가 먼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6년 동안 언제나 개근상과 우등상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그가 평양에 있는 미션스쿨 광성중학교(6년제 중학과정)에 합격하자, 부친은 암소를 팔아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주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경과 영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평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김성혁은 학교에 선교 장학금이 있는 줄 알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2학년 때부터 성적이 우수해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새벽에는 신문배달로 생활비를 버는 고학을 했다. 졸업이 임박하자, 선교사들이 그에게 동양 최고의 외국어대학인 동경외국어대학 영문과에 합격하면 장학금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꿈을 안고 여비를 받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동경에 가서 시험을 쳐 10대 1이 넘는 큰 경쟁을 돌파해 합격했다. 그를 우수한 모교의 영어교사로 만들기 위한 학교의 첫 해외장학생이었다.

그의 일본 대학생활도 한국에서의 생활과 비슷했다. 그는 한국에서처럼 학비는 보내오는 장학금으로 냈고, 나머지 책값과 생활비는 고학으로 벌어서 메웠다. 중학생 때부터 고학생활이 몸에 배어 근검생활이 그의 삶의 자세가 되었다. 3년의 대학과정을 마친 그는 교사의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때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온 국민이 일제의 전쟁수행의 노예가 되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모교 광성중학교가 폐교되어 선교사들이 모두 미국으로 쫓겨 간 후였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1942년부터 평안남도 안주공립중학교의 영어교사로 취직한 후, 어른들의 성화에 고향 처녀와 결혼을 했다. 1년 후, 일본은 적국인 미국 영국의 언어 영어교육을 중지시켰고 그는 해방될 때까지 무위도식해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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